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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경순왕계보 숙승~수성최씨

by "율문" 2012. 4. 20.

 

경순왕(敬順王/882~978)

 

 父 : 김효종(金孝宗)

 生 : 882년

 卒 : 978년

 子 : 김명종(金鳴鍾) 9남중 3남(鎰,惶,鳴鍾,殷說,錫,건,선,추,덕지)

 

          김효종의 子-경순왕(敬順王/882~978) 56대 신라왕 : 재위기간(927~935) 金傅

 

          諱傅繼景哀王朴氏而立後唐明宗二年丁亥卽位 潞王 乙未以國弱讓于高麗太祖

          封樂浪王食邑八千戶歲給祿一千石國除爲慶州妻以長女神鸞公主麗祖前妣長女

          在位九年宋太宗太平興國二年戊寅 薨 諡 敬順 . 陵在長湍府 東聖居山東向洞

          (휘부계경애왕박씨이립후당명종이년정해즉위노왕을미이국약양우고려태조)

         (봉낙랑왕식읍팔천호세급록일천석국제위경주처이장녀신란공주려조전비장녀)

         (재위구년송태종태평흥국이년무인훙 시 경순. 능재장단부 동성거산동향동)

 

           妣 : 朴氏 生 三男一女 (昭元王后 朴氏-죽방부인)

           妣 : 王氏 生 五男一女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王氏)

           (별빈 순흥안씨)가 있었다고 한다.

 

 #.(薨逝(훙서)-임금이나 왕족()ㆍ높은 귀족() 등()을 높이어 그의 '죽음'을 이르는 말)

        鸞 (란)-난새 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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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56대 마지막 왕 : 927~935 재위,신라김씨왕위를 이를 자가 마땅한 인물이 없자

          박씨계의 아달라이사금의 후손인 경휘인 신덕왕:912~916년재위,경덕왕(승영:917~924년

          재위,),경애왕(924~927년재위)를 이어 다시 신라김씨왕통을 받으나,국운이 기울자

          조정과 마의태자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귀속함.

 

                      長子-김일(金鎰) : 마의태자 (개골산 입산)

                      二子-김굉(또는 김황 金惶) : 나주김씨

                      三子-김명종(金鳴鍾) :경주김씨 영분공파

                      四子-김은열殷說 : 경주김씨 은열공파,大安公派

                      五子-김석(金錫) :의성김씨

                      六子-김건 : 강릉김씨

                      七子-김선 : 언양김씨

                      八子-김추 : 삼척김씨

                      九子-덕지 : 울산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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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마지막왕 경순왕과 9명의 아들과 분적성씨

 

 

경순왕은 신라의 제56대 왕으로 마지막 왕이다. 제 46대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름은

 부이다.경순왕의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이찬 효종이며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경순왕의 첫 왕비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주:죽방부인 박씨, ) 그녀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다.

 

[경순왕릉] 

 

 

큰아들은 마의 태자이고 둘째 아들은 범공으로 통한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에 바친 뒤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경순왕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견훤이 927년 경주를 급습하여 경애왕과 그의 비빈등

많은 왕족을 모두 잡아 왕비를 강간하고 경애왕에게는 자결을 명하였다. 경애왕이 죽고 난 후

 경애왕의 친척인 김부를 내세워 신라의 왕에 앉히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으니 후백제의 횡포는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해 고려의 왕건은

 신라에 우호적으로 대하였다. 왕건은 신라는 후백제를 무너뜨리면 자연히 넘어 올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그리하여 신라에 대해서는 무조건 우호적이었다. 931년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을 수도로

 초청하였다. 이때 태조는 경순왕을 왕으로써 대접하고 군기를 바로잡아 신라의 민가는 건드리지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견훤에 의해 약탈당한 적이 있는 지라 왕건이 왔을 때 심히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군사들이 민가를 괴롭히지도 않고 신라인을 고려인과 같이 대하니 감격하여

왕건에게 민심이 쏠렸다.이때 왕건은 신라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후백제의 미움을 사지 않는

 한에서 신라에 협조하고 있었다.

 

935년 후백제의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에게는 아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중에서도 후궁이 낳은

넷째 아들 금강을 무척 사랑하였다. 견훤은 사후 금강에게 왕위를 주고 싶었다. 이것을 눈치

 챈 큰아들과 둘째, 셋째는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받고 싶어 거사를 단행하였다.

 

 

큰아들인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왕위에 즉위했다.분하게 여겼던 견훤은 후백제

에서는 분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려의 왕건을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왕건에게

 의견을 타진했다. 왕건은 견훤을 후히 대접하겠다고 약속했고 견훤이 투항해오자 아버지라

 하며 후대하였다.

 

 

935년 경순왕은 견훤의 투항으로 크게 자극되었다. 10월 경순왕은 백관들을 불러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는 문제를 의논하였다. 일부의 군신들은 찬성하였고, 일부의 군신들은 반대

하였다. 특히 마의태자는 통곡해마지 않았다.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과 의혈지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항복을 의논함이 옳을 것입니다.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경순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를 온전히 유지할 수 없으니 이왕 강해지지도 못하고

 또 더 이상 약해지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내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태자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순왕은 시랑 김봉후에게 명을 내려 조서를 짓게 한 뒤 고려

태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러자 마의태자는 통곡하면서 왕과 이별을 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를 걸친 채 풀뿌리로 연명하여 일생을

 마쳤다.

 

 

935년 11월 태조 왕건은 대상 왕철등을 보내 항복하려 오는 경순왕 일행을 맞이하였다.

 경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태조 왕건이 있는 송악으로 향했다. 경순왕

일행을 태운 향거보마가 30여리에 뻗었고 일행이 지나가는 길은 신라의 마지막을 구경

하려는 인파로 뒤덮였다.

 

 

태조 왕건은 교외까지 경순왕을 마중나왔다. 왕건은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기까지 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신라를 차지한 왕건은 그해 12월

 경순왕을 정승공으로 봉했는데 이 직위는 태자보다 높은 일인지하의 높은 자리였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녹 1천석과 시종들을 주었다. 그리고 신라의 도읍인 금성을 경주로 고쳐

 경순왕에게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태조 왕건이 자신의 딸을 후궁으로 주자 경순왕은 조카딸을 왕건의 후궁으로 주었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의 조카딸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고려 현종의 아버지로

나중에 안종으로 추봉된다.

 

 

또한 고려 경종은 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고 경순왕을 상부령으로 삼았다.

경순왕은 978년 죽을 때까지 고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보장왕이 중국으로 끌려가 쓸쓸히 죽은 것과 비교하면 망국의 왕으로서는 행복한 편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경순왕 사당을 지어 그의 혼을 떠 받들었는 데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순왕의 혼을 모시는 민속신앙은 일제시대까지도 성행했다고 한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 : 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뒤 왕위를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첫째 김일(鎰)은 부안 김씨,(일의 아들은 선웅,순응으로 선웅이 부안,통천,부여김씨

둘째인 순웅이 경주김씨 대장군공파)

 

 

둘째 김굉의 아들 김운발(金雲發)은 나주 김씨, (해인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으며 운발,

우발 두 아들을 낳았는데 분발이 나주,교하,안로,해주,울산김씨, 우발이 경주군에 책봉)

 

 

셋째 김명종(鳴鐘)은 경주 김씨 의 영분공파, (강화,계림,낙안,우봉김씨)

 

 

넷째 김은열(殷說)은 경주 김씨 은열공파, 선안동김씨 (은열은 태화,계령,숙승,염,갈 5아들을

 두었는데 태화는 경주김씨 대안군공파, 혹은 은열공파, 울진김씨. 숙승은 안동김, 수성최

(방경의 동생인 충순공 현경이 수성최씨의 시조),김녕,대구,밀양,서흥,안악,안산,영덕[영해]

구례,김녕,양근,양주,연주,연산[영산]월성,전주,청품김씨, 넷째인 염은 품언,심언 두 아들을

 두었는데 품언은 수원,용담,용성,인동,한남김씨, 심언은 영광김씨)

 

 

※ 대안군 은열은 1028년 3월 4일 졸하였으며 개성 오룡산에 안장하였으나 실전하였으며

 1784년 영조대에 발견되어 자세한 자족사항을 알게 되었다.

 

 

다섯째 김석(錫)은 의성 김씨, (의성,개성,광주,설성[음성],적성,서해,고령)

 

 

여섯째 김건, (강릉,강서,청주,홍주,가평)

 

 

일곱째 김선(鐥)은 언양 김씨, (언양,담양,예천)

 

 

여덟째 김추(錘)의 아들(김위옹)은 삼척 김씨, (삼척,진주,영월,경산,남원,길안,웅진,

진위,춘양,선산[들성],희천딤씨)

 

 

아홉째 김덕지(德摯)는 울산 김씨 등이 되었다.

 

 

경순왕의 9아들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9아들중 마의태자(麻衣太子)로 잘 알려진 김일은 망국의 한을 품고 개골산(愷骨山

: 금강산)으로 입산(入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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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순왕의 妃

 

아버지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며, 어머니는 충주지방 호족 긍달(兢達)의 딸인

신명태후(神明太后) 유씨(劉氏)이다.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결혼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로 불렸다.

 

 935년 11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자진하여

항복하자, 왕건은 자신의 아홉 딸 중 맏딸인 낙랑공주와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 소생의

공주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자신은 신라왕실에서 신성태후(神成太后) 김씨를 맞아들였다.

 

 고려 왕실에서 공주가 다른 성(姓)과 혼인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경순왕에게만은

2명의 공주와 혼인시켰다. 이는 귀부(歸附)한 경순왕에 대한 예우와 신라왕실과의 이중

혼인을 통해, 고려 왕실의 신분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통일된 한반도를 용이

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보장받으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