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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공파(유항)6세

수성최씨 7세손 윤명

by "율문" 2012. 7. 6.

 

 

 

 

 

 

 

 

 

 수성최씨 찬성공파 윤명 상계도 

본관 ; 수성최씨

휘는 ; 윤명

호는 ; 방촌

공의 휘는 윤명(潤明)이시오 호는 방촌(芳村)이라 하시니 찬성공 휘는 유항(세조6세손)의 아드님이시다.

자질이 정중하시고 천성이 순근 겸허 하시므로 시서예약에  능하지 아니하심이 없으셨고 또 조행이 개결하시와 공명에 뜻을 두지 아니하시고 그 종형되시는 극기재 극기재는 安讓公의 자로 휘는 윤신로  더불어 뜻이 같고 마음이 함하시어 항상 고요하고 궁벽한 곳에 함께 거처하시며 문인 고우로 경전과 사서만을 강구하시고 세상일을 말슴하지 않으시다가 아버님의 명령으로 한번 과거에 응시하시어 사마과를 참방하신후 은일로 천망되시여 동궁위솔로 세자를 보호하시다가 세자의(세자는 연산군) 부덕함을 아신후 궁관을 사직하시고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시기 위하여 직산 당진 두 고을을 지내심에 정사를 밝게 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시니 자연이 칭송이 자자하시므로 조정에서  청백리로 추천하였으나 공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벼슬에 있는 동안 수십명가족이 밥을 먹고 옷을 입는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것이라 하시며 받지 않으시고 집에 돌아오셔서 정원을 가꾸시면서 세상에 나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유명한  유학자인 점필재 김종직과 더불어 도의지교가 있었고 또 인친의 의가 있었다. 

 

김공이 성종의 신임을 받고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었으니 언론이 너무 과격하므로 공께서 한상 말씀하시기를 말이 너무 모가 나면 몸에 화가 돌아오기 쉬우니 언론에 주의하는것이 좋다고 충고 하셨다.

김공도 그 말씀을 옮게 여기면서도 실행을 못하였다가 사후에 부관 참시의 참화를 당하고 그 문인들도 귀향을 가거나  죽임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아니하였다.

공께서는 그후 서울에 돌아가지 아니하시고 또 말씀을 삼가 신고로 그 와 같은 화을 먼하고 계시다가 중종조에 은진 고을에 여러 해 동안 판단치 못할 의옥 사건이 있으므로 조정암이하 여러분의 강권으로 부득이 은진현에 나가셔서 불과 한달에 그의옥사건을 원만하게 해결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제 늙어서 일을 감당치 못하겠다. 하시고 돌아 오셔서 천수를 마치시니 춘추가 칠십사세이셨다.

 

장문은 ; 종이품가선대행시 강원부 첨사겸규장각직제학진산후인 강경희 근찬

수성최씨 족보 부록편 308~310페이지 방촌선생행장편 

글쓴이 겸 옴긴이 ; 찬성공파 시은공감사 및 첨악공이사  崔  寬  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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