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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반 상 식

조선사 - 17. 이시애의 난

by "율문" 2013. 9. 22.

                                             

 조선사 - 17. 이시애의 난

 

고려 말까지 황해도 이북지방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여진족의 침략이나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하여, 영토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함경도와 평안도는 버려진 땅이었고, 원이 물러난 뒤, 여진족의 삶터가 되었다.


하지만, 고려가 멸망한 뒤, 함경도 출신인 태조 이성계가 왕으로 칭하기 시작하면서, 북변 지방에 관심을 갖게 되고, 세종 조에 이르러 두만강 지역까지 영토를 확대하고, 남도 주민들을 북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단종이 즉위한 후, 북변을 개척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종서가 세조에게 타살된 뒤, 북변은 다시 무관심으로 빠져들게 되고, 점차 소외된 땅으로 남게 되었다. 더구나 이징옥의 반란으로 인하여, 역적의 땅이라 하여, 북도 출신의 관리를 거의 임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방 통제를 목적으로 시작한 호패법은 많은 북변인의 활동을 제약하고, 함길도 절제사인 강효문의 수탈은 많은 함길도 주민들을 분노케 만들어 반란을 일어나게 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1467년 5월, 전 회령 대도호부의 절제사까지 지낸 인물인 이시애라는 인물이 함길도 병마절제사인 강효문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푸는 와중에 술 취한 강효문을 목 찔러 살해했다.


그는 조정에 사신을 보내어 "강효문이 신숙주, 한명회와 역모를 꾀했다."고 상소를 올렸고, 함길도 주민에게는 자신이 새로운 함길도 도절제사이고, 삼도 군사가 현재 함길도 주민을 죽이려고 올라오고 있다면서 봉기를 호소했다. 이에 대다수 함길도 주민들은 궐기를 했고, 이에 당황한 조정은 도총관 강순을 진북장군에 삼아 영흥으로 넘어가게 하고, 병조참판 박중선을 평로장군으로 삼아 문천으로 진격하게 하고, 어유소는 군사를 이끌고 함경, 강원, 평안, 황해 4도 병마절제사인 이준에게 가게 했다.


관군을 이끈 이준은 강순에게 박중선과 길을 나누어 홍원 종개령과 산개령을 넘어 북청으로 진출하게 했다. 그리고 절도사 허종과 대장 허유소의 군대는 양화를 거쳐 북청으로 들어오게 했다. 동시에 이준 자신은 대부대를 끌고 함흥을 출발하여 함관령 밑 산원에 주둔했다.


이시애의 반군 1만 6000명은 북청읍에 주둔하여, 주둔중인 진압군을 공격했다. 하루에 걸친 대공격으로 몇 겹으로 둘러친 반군은 강력히 방어하는 진압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시애의 아우인 이시합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사기가 떨어져 더 이상 싸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 이시애는 휴전을 요청하고, 이에 관군도 화살이 다 떨어져 위험상태에서 반군이 먼저 휴전을 요청하자, 이에 수락했다.


하지만, 반군의 기세는 여전했다. 이준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금 적의 기세는 왕성하여, 지방의 주민 모두 적에게 붙어있고, 관군에 있으려 하는 자는 모두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관군에 넘어오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시애의 군대는 7월 14일 흥원 지방에 다시 집결했다. 이명효와 이시합은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지구전의 태세를 갖추고, 각 지방의 길을 끊고, 관군을 자멸시킬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곧 관군에게 세워나가 강순은 이준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급속히 응원군을 파견했다. 7월 17일에 이준은 본영 및 전방 부대 병력 2만 여명을 3진으로 편성하여 진공태세를 갖추었다.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감을 짐작한 반군들은 겁먹고 속속히 관군에게 투항하거나 도망쳤고, 이시애도 작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는 북청까지 후퇴하여, 결전의 태세를 갖추었으나, 이미 병력은 5000여 명으로 줄었고, 군사들의 일부가 이시애를 사로잡아 관군에게 넘길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었다. 이것을 눈치 챈 이시애는 여진족의 응원을 받기 위해 단천으로 도망하였으나, 자기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8월 12일 이준의 군영에 압송되었고, 3일간 국문 끝에 군영 앞에 효시되었다. 난이 일어난 지 62일 만에 약 3만 8000여명이 동원되었고, 2만 851명이 진압군으로 함경도에 갔었다.


이시애의 난 이후 이시애가 태어난 함길도는 경성을 기점으로 두개의 도로 나뉘어 이전보다 더 강력한 통제를 받게 되었고, 길주는 역적의 땅이라 하여, 길성현으로 강등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적개 공신이 봉해지고,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남이, 이준, 강순, 유자광등이 높은 관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곧 남이의 난으로 곧 생사가 엇갈리게 된다. (다음 이야기에 다룹니다.) 이시애의 난으로 함길도는 조선 역사에서 잊혀진 땅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출신지이었지만, 더 이상 그들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 이징옥, 이시애 등은 반란을 일으켜, 그들을 이용하여, 정권을 획득하려고 했다. 결국 실패로 끝났고, 그 휴유증인지 몰라도 세조는 1년 뒤 세상을 떠났다. 세조가 죽자,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피바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또 다른 피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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