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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막공(지신)16세

휘는 광련(光鍊) 호는 사성재공(思誠齋公)

by "율문" 2017. 12. 19.

○성  명 : 휘는 최 광 련 崔  光  鍊  ○호는 사성재(思誠齋)

○품  계 : 절충장군(折衝將軍)
○관  직 :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15.수성최씨 찬성공파 첨악공손 세조 17 최광련 태계 호자 집안 내오의 장남

년도시험 : 哲宗 12 (1801)式年 生員
 【합격등위】 2등 0013
 【본인성명】 최광련(崔光鍊)
 【본인생년】 신축(辛丑) 1781 
 【본인본관】 수성(隋城) 최(崔)
 【본인거주】 춘천(春川)
 【본인구존】 영감하(永感下)
 【본인전력】 유학(幼學)
 【본인과목】 일의(一疑)
 【부친성명】 최내수(崔乃秀)
 【부친과거】 성균생원(成均生員)
 【생부성명】 최내오(崔乃悟)
 【생부관직】 /학생(學生)
 【생부구존】 영감하(永感下)

행장문

공(公)의 휘는 광련(光鍊)이시오 호는 사성재(思誠齋)라 하시니 첨악공(瞻嶽公)의 八세손이오 연정(淵正)

선생의 재증손이시다. 공을 나실대는 지붕위에 무지개가 뻗쳐있어 이웃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더니 공을 낳으심에 자질이 미려하시고 미목이 청수하시며 어려서부터 효애지심이 특이하시더니 八세때부터 부모에게 혼성신성하는 법절을 가르치지 않아도 잊지 아니하시고 매일 실행하시며 부모 봉양에 조금도 유감없이

五十여년을 하루같이 하시다가 부모상을 당하심에 三年동안 여막에서 나오지 아니하시고 혹독한 추위와

심한 더위라도 잠시도 상복을 벗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석달동안 병환으로 게시면서 조석. 상식이나

조섯곡을 페하지 아니하시고 항상 슬퍼 애통하시고 모골이 수척하시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케 하시더라 三年상을 마치신 후로는 조석으로 사당에 참배하시기를 九十이 되도록 하루도 게을리 아니하시고 항상 말씀을 삼사하시므로 환소잠담을 아니하시되 사람을 대하실때는 공손하고 예의가 있으시며 의로서


자손을 가르치시고 은혜로서 비복을 대하시며 가란한 사람 보시면 구제하시는데 아끼지 아니하시고 마땅치 않은 일을 보셔도 웃고 괘념치 아니하시므로 선악과 귀천을 귀별하지 아니하시고 하나같이 대하시와 모든사람들에게 각기 환심을 얻으시고 의리와 사정을 분별하시는데있어서 확고하신 주장을 굴하지 않으시더라 문하에 배우는 사람이 많으므로 춘추로 제자를 모아서 강의하시는데 항상 정성자와 용서서자 두 자를 가지시고 순순히 이르시데 정성이라 하는것은 진실 무위한 것을 말하는것이요 용서라 하는것은 내 마음을 미루어서 남을 이해하는 뜻이니 이 두글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알기 어려운 뜻이 아니요 아무라도 같이 행할수 있는 길이라 능히 이 마음을 확충 실행하여 마지 아니하며 어리석은 자라도 군자가 될수 있고 또 내 한몸을 미루어서 천하에도 미칠수있다 하시고 또 이르시데 배우는 자 특히 주의할것은 사람이 보는곳에서는 예절을 지키고 남이 보지 않는 곳이라도 행실을 태만히 하지말라 하시고 맹자의 사성의 뜻을 사모하시와 호를 사성이라 하시니라 철종 신유년에 사성재(思誠齋)선생의 춘추 八十一세 고령으로 철종 임금님으로 부터 첨추오위의 위장(衛將) 체아직(遞兒職) 직 첩 품  계 : 절충장군(折衝將軍)  관  직 :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을 제수 받으시고

八十五세에 돌아가시니 고을 선비가 모두 사마복을 입고 슬퍼하시며 사림의 예로 장사 지내시다.

그 둘째 아드님 진사 휘는 재성이 화공으로 하여금 선생의 추상화를 그려 봉안하니 화상찬은 전 현감 연안이 헌가 짓고 행장문은 진사 완산 이중진이 지었다. 


수성최씨 족보 부록 303페이지 사성재(思誠齋) 선생편

옴긴이 : 수성최씨 첨악공총무이사14년재임 및  감사 ; 寬 爀 호는 소담(昭 淡)

2017년12월20일



1849년 최광련(崔光鍊)춘천부(春川府)로부터 발급받은 준호구(準戶口)이다.
최광련춘천부 서상(西上) 권산리(權山里)에 거주하였고 문서를 발급받을 당시의 나이는 69세였으며 본관은 수성(隋城)이다.
가족구성원으로 아들 최재성(崔在聲), 며느리 전주이씨(全州李氏), 손자 동몽(童蒙) 최하현(崔夏鉉), 아우 최광건(崔光鍵), 제수 동래정씨(東萊鄭氏), 조카 최재붕(崔在鵬), 조카 며느리 문화유씨(文化柳氏), 조카 최재렴(崔在濂), 조카 사위 이기채(李夔采), 아우 최광진(崔光鎭), 제수 문화유씨(文化柳氏), 조카 최재기(崔在驥), 조카 며느리 초계정씨(草溪鄭氏), 조카 최재선(崔在璿), 조카 며느리 초계정씨(草溪鄭氏), 조카 최표양(崔豹鍚), 서제(庶弟) 최광회(崔光繪), 제수 청송심씨(靑松沈氏)가 함께 거주하였다.


1849년(헌종 15)春川府에서 西上 權山里에 거주하는 幼學 崔光鍊에게 발급한 준호구이다.
조선시대의 준호구는 오늘날의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성격을 가진 문서로 主戶의 신청에 의해 발급되며 주호가 신청을 하면 해당 관청에서는 호적대장의 내용에 의거하여 그 내용을 등서해 발급하였다. 준호구의 형식은 經國大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발급일과 발급날짜를 먼저 기재하고 考干支成籍戶口帳內로 시작한다. 이후로는 주호의 거주지와 가족구성원, 주호와 처의 四祖 및 소유 노비에 대해 連書한다. 해당 문서도 이러한 기재방식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周挾改印과 官印, 수결은 있으나 부사를 기재하지 않은 것은 특이한 점이다.
문서에 따르면 최광련신축년(1781)생으로 당시 나이는 69세였고 본관은 隋城이다. 최광련의 父는 成均生員 崔乃秀이고 生父는 學生 崔乃悟이다. 생부가 기재된 것으로 보아 최광련최내수의 양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친이 동일하고 출생년도와 처의 성씨가 모두 같은 것으로 보아 1801년최한달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1831년 최내수의 준호구에 아들로 등장하던 최광련이 본 준호구에서는 주호가 된 것으로 보아, 아버지 최내수1831년에서 1849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祖는 學生 崔準海이고 曾祖는 學生 崔昇이다. 外祖는 通德郞 權揄이며 본관은 安東이다.
平康蔡氏는 사망하였는데, 평강채씨1831년 최내수의 준호구에도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함께 사는 가족으로는 아들 崔在聲(36세), 며느리 全州李氏(38세), 손자 童蒙 崔夏鉉(11세)이 있다. 1831년의 문서에는 최광련의 첫째 아들 崔在聞과 며느리 善山金氏가 등장하나 해당 문서에는 기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분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아우 幼學 崔光鍵(58세), 제수 東萊鄭氏(45세), 조카 幼學 崔在鵬(23세), 조카 며느리 文化柳氏(25세), 조카 幼學 崔在濂(21세), 조카 사위 幼學 李夔采(29세)가 있다. 조카사위가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보아 조카 딸도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아우 幼學 崔光鎭(53세), 제수 文化柳氏(53세), 조카 幼學 崔在驥(31세), 조카 며느리 草溪鄭氏(33세), 조카 幼學 崔在璿(22세), 조카 며느리 草溪鄭氏(23세), 조카 童蒙 崔豹鍚(19세), 庶弟 幼學 崔光繪(26세), 제수 靑松沈氏(26세)가 함께 거주하였다. 최광건, 최광진, 최광회도 모두 최내수의 아들이나 이전의 문서들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해당 문서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최광련이 소유한 노비는 총 44口로, 이 중 남자종은 24구, 여자종은 20구이다. 노비들의 출생년도는 모두 기재되었으나 부모 사항에 대해서는 불규칙적으로 기재되었다. 44구의 노비 중 3구는 외방노비이며 이들은 모두 여자종이다. 1구는 광주에 거주하는 것으로 기재되었고 2구는 거주하는 지역에 대해 기재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문현주, 조선후기 漢城府에서의 戶口單子·準戶口 작성 과정에 관한 再考, 古文書硏究42, 한국고문서학회, 2013
유재춘, 강원도내 戶口 古文書의 현황과 특이사례에 대한 검토, 古文書硏究39, 한국고문서학회, 2011
손병규, 호적, 휴머니스트, 2006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2003

조선시대 양반에게 발급한 "준호구"문서 와 국조방조에 기록되여 있는

과거급제 기록문서 입니다.

위 최광련 조상님은 수성최씨 세조13세 태계손(자앙공) 4자 호자 증손자로서 태계 아우이신 태숭집안 증손자 내수 장남(양자) 입적하여 과거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여 정3품 당상관까지 오르신 조상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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