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관 ; 수성최씨
휘는 ; 수(燧)
호는 ; 후헌(后軒)
파는 ; 찬성공파 첨악공손)
회장 : 태계( 한용) 총무이사 태계(덕희)
공의 휘는 수(燧) 이시오 호는 후헌(后軒)이라 하시니 궐산공의 아드님으로서 천성이 간묵하시고 재기가 총명하시므로 소년시부터 사림간에이름이 나셧으나 대소과 십여회에 다 참방하지 못하고시고 가라사대 내 양친이 구몰 하셨으니 누구을 위하여 영달을 구하리오 하시며 순전히 서적을 저술하시거 후학을 가르치시는데 힘을 쓰시며 혹독한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쉬지 아니하시고 병환이 계시거나 노래가 되시어도 게울리 아니하시니 공의 문하에서 배운자는 누구나 다 성취하여 그 빛난 문명이 묻지 아니하여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 지방에서 글을 숭상하는 선비가 많이 난것을 공의 재종숙 졸옹공과 삼종형 출암공 및 출옹 이주씨 때로부터 시작 되였고 공이 다시 그뒤를 이으시와 무모한 풍속이변하여 빛나고 빛나는 문향이 되였다.
자질에게 권학을 하는 방도를 엄격하게 하시되 엄동 설한에도 밤을세워 글을읽히시니 날은차고 방도 차서 옷에 있는 이와 벼룩이 얼어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후원공의 조카(문과사헌부감찰하양현감)을 지내신 휘 태후 사헌공이 항상 말씀하시기을 좋아하신 반면에 남의 잘못을 숨기지 못하는 성품이시라 반드시 면담하여 책망을 하시되 흉금을 털어놓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싫어하지 아니하도록 순순히 이르시어 누구나 원망하고 협의하는 사람이없게 하셨다.
우봉이씨의 명조인 도암 이재가 공이 저술하신 천인간물 내의등서를 보고 탄식해 가로대 옛적 사람이 생각지도못한 깊은 뜻을 밝혔으니 오늘날 비로서 참된 글을 보았다고 하였다.
공이 저술하신 문집이 허다함으로 당시 선비들이 빌려보고자 하니 내 놓지 아니하시니 어떤 사람이 그 영유를 물은즉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책은 나 혼자만이 즐겨볼 뿐이요 만일 다른사람이 보면 반드시 잘하고 못한 것을 논평할 것이니 나 혼자서 즐겨하는 것을 가지고 남의 시비사이에 들어가기를 원치않는다.
하심으로 유고 三十여권을 쓰셨으나 전하지 못하다가 종가의 화재로 전부 소실이 되였으니 아깝지 아니하리오......끝
장문은 ; 공의 칠세손 전 참봉 순현 근찬
수성최씨 족보 부록 325 ~326 ~327페이지 수 (후헌공 선생) 편
글쓴이 겸 옴긴이 ; (현직) 수성최씨(대의원) 찬성공파(대의원) 시은공(이사)첨악공(감사) 崔 寬 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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