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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문혜공(영규) 1세

수성최씨 시조 문혜공(영규) 행장록

by "율문" 2018. 3. 31.

행장록
시조 문혜공(文惠公)

공(公)의 본성(本姓)은 김씨(金氏)시요 휘(諱)는 영규(永奎)시니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공의 육대조(六代祖) 되시는 휘(諱) 이청(利請)이
본관을 안동(安東)으로 옮기신 후
오대조(五代祖) 휘 의화(義和) 고조(高祖) 휘(諱) 민성(敏成)은 한림학사시고
증조(曾祖) 휘(諱) 효인(孝印)은 한림학사 병부상서시요
조(祖) 휘(諱) 현경(玄慶)은 좌정승(左政丞) 충순공(忠順公)이시니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아우시요
고(考) 휘(諱) 준(悛)은 첨의찬성사시니
공이 원래 재덕이 겸비하시와 고려 원종(元宗) 2년 신유(辛酉)에 문과(文科)하시고
벼슬이 형조전서보문각대경(刑曹典書寶文閣大卿)에 이르시매 지위와 명망이 높으시더니
충렬왕 때에 수주(水州:水源) 일경에 풍속이 퇴패하고 오륜과 삼강이 없어져서
사람의 행동이 금수와 다름이 없이 되매 왕께서 일로 근심하시거늘
공께서 자청하시고 호장(戶長)으로 가셔서
부사 안열(安說)과 한가지로 백성을 효도로써 가르치시고 의리로써 인도하신 지 불과 1년에
그 완패하던 풍속이 변하여 효제지향(孝悌之鄕)이 되니
백성들이 공의 덕을 칭송하매 왕이 크게 기뻐하시고
그 공덕이 높다 하여 성(姓)을 최씨(崔氏)로 주시고 수성백(隋城伯)을 봉하시니
수성최씨(隋城崔氏)가 이로부터 시작되니라.
그 후 호남(湖南) 안무사로 가셨다가 돌아가시니
시호(諡號)를 문혜공(文惠公)으로 내리시니라.
공이 돌아가신 후 수원 백성들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각기 힘을 합하여 읍리(邑吏)들이 서로 더불어 제사를 지내다가
임진왜란 후 근 백년 동안 산소가 실전이 된 후
그 근처에 사는 우씨(禹氏)들이 청룡(靑龍) 등에다가 투장을 하고 산소 석물을 전부 메웠으므로
얼마 동안 산소를 찾지 못하였다가
이판공(吏判公)의 현손(玄孫) 휘(諱) 치숭(致崇)이 기장원(機長員)으로 계실 때에
정성을 다하여 산소를 찾은 후 위토를 장만하여 묘사를 건축하고
매년 10월 1일에 향사하고
정종대왕(正宗大王) 경신년(庚申年)에 신도비를 세우니
비문은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세자이사(世子貳師)덕은(德殷) 송환기(宋煥箕)가 짓고
글씨는 통정대부 인천도호부사 창원(昌原) 황운조(黃運祚)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기계(杞溪) 유한지(兪漢芝)의 필법이니라.

시조휘영규(始祖諱永奎) - 고려원종2년신유등문과(高麗元宗二年辛酉登文科) 숭록대부형조전서보문각대경개경유수남안무사봉수성백(崇祿大夫刑曹典書寶文閣大卿西京留守南按撫使封隋城伯) 증시문혜공(贈諡文惠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