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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공(원개)3세 안양공파(경)5세

수성최씨 세조3세 봉암공(원개) 행장록

by "율문" 2018. 7. 21.

 

(公)의 초휘(初諱)는 사위(士威)이시고,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30년 갑진(甲辰:1304)에 출생(出生)하셨으며, 고(考) 휘(諱) 흡(洽) 정당문학 찬성사(政堂文學 贊成使)의 장자(長子)이시다.

  공민왕(恭愍王) 2년 계사(癸巳:135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시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와 판삼사(判三司) 좌사(左使)를 겸하셨다.

  이때에 신우(辛祐)가 국병(國柄)을 도절(盜竊)함을 보시고 시중랑(侍中郞) 김사안(金士晏)과 더불어 벼슬을 사양하시고 장단(長湍) 봉암동(鳳巖洞)에 돌아와 복자당(伏雌堂) 삼간(三間)을 지으시어 문인(文人) 하륜(河崙), 권중화(權仲和) 등 일백육십여인(餘人)과 더불어 날마다 시문(詩文)과 경학(經學)을 강론(講論)하셨다.

  신우(辛祐), 창(昌) 부자(父子)가 주살(誅殺)된 후 하륜(河崙) 등이 와서 말하기를 선생께서 조정(朝廷)에 나가시면 간신배(奸臣輩)는 물러가고 어진 이는 나오게 될 것이니 이는 국가(國家)의 대계(大計)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들의 다행일까 하나이다. 하거늘 공(公)께서 탄식(歎息)하시며 말씀하시기를 경순왕(敬順王)께서 나라를 태조(太祖)께 부강(附降)하신 후로 오백년(五百年) 동안에 국은(國恩)이 망극(罔極)한지라 내 어찌 나라를 생각하지 아니하리오마는 지금 반정(反正) 제신(諸臣)들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어 임금의 위엄이 날로 떨어지고 나라일이 날로 어그러질 뿐 아니라 강수(江水)가 적불(赤불)하고 목마(木馬)가 해어(解語)하니 어찌 두렵고 삼가 않겠는가? 하시거늘 하륜(河崙) 등이 그 뜻을 물으니, 강수(江水)가 적불(赤불)하는 것은 사람에 적족지화(赤族之禍)가 있을 것이오 목마해어(木馬解語)는 나라가 바꿔질 조짐이라 하시고 시(詩)를 지어 보이시며 다시는 세상일을 말씀 안하신다 하시니, 하륜(河崙) 등이 도리어 두렵고 부끄러워 하는 빛이 있더라.

  공(公)께서 젊었을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시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시며 여러 서적을 널리 열람(閱覽)하시고 지략(智略)이 막힘이 없으셨으며 후학(後學)들에게 학문(學問)을 일깨우는 것을 자기(自己) 소임(所任)으로 삼으시니 사방의 학자(學者)들이 더욱 우러러 사모(思慕)하였다.

  평생 언행(言行)이 원만하셨으며 대의(大義)에 통하시고 사리(事理)에 밝으셔서 살림이 비록 공허(空虛)해도 뜻대로 하지 않으셨고 출입(出入)하실 때엔 항상 서적(書籍)을 가까이 하셨으며 벼슬에 계실 때에는 법규(法規)에 맞는 바른 정치에 힘쓰시고 집에 들어오셔서는 자애(慈愛)롭고 근검(勤儉)하신 마음을 베푸셨다.

  당시에 풍속이 불법(佛法)을 숭상하는 사람이 많거늘 공(公)께서 깊이 염려하시어 사서인(士庶人)으로 하여금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본받아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조(先祖)께 제사(祭祀)를 받드는 법을 가르치시니 세상에 염락(염洛)의 좋은 풍속이 돌아왔다고 하였다.

  공(公)께서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평장사(平章事)로 계시면서 18조목의 글을 공민왕(恭愍王)께 세 번이나 올리셨다가 왕의 진노(震怒)함을 사 청풍군사(淸風郡事)로 귀양 가셨다가 향리(鄕里)로 돌아오셔서 날마다 문인(門人)과 더불어 성학(聖學)을 강론(講論)하시고 혹 강호(江湖)에 노니시며 초탈(超脫)한 생활을 보내셨다. 조정(朝廷)에 나가시면 경세제민(經世濟民) 하셨고 물러나 계실 때엔 학문(學問)을 강습(講習)함으로서 진리(眞理)를 알고 실천(實踐)하는 것을 평생의 기량(技倆)으로 삼아 작록(爵祿)의 편안함 보다는 향촌(鄕村)의 궁색(窮塞)함을 즐거이 여기시어 근심을 잊으시니, 고산(孤山) 이존오(李存吾)가 대인군자(大人君子)라 호칭(呼稱)하셨다.

  문인(門人) 이첨(李詹)의 구규지헌(九規之獻)과, 박사(博士) 김초(金貂)의 훼불지소(毁佛之疏)는 다 공(公)께서 저술하신 것이며, 만년(晩年)에 율리사(栗里詞) 삼편(三篇)과 훼불문(毁佛文) 이편(二篇)을 지으셔서 세상에 전하시니, 목은(牧隱) 선생께서 항상 동료에게 말씀하기를 공(公)께서 신(辛)씨 조정(朝廷)에 벼슬하지 않고 마침내 암혈지사(巖穴之士)가 되어 명철(明哲)하게 보신(保身)하셨으니 우리도 차라리 이 사람의 높은 지조(志操)에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명(明) 홍무(洪武) 24년 신미(辛未:1391) 추팔월(秋八月) 임인일(壬寅日)에 장단(長湍) 봉암동(鳳巖洞)에서 졸(卒)하시니 향년(享年) 88세이셨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 대언(代言) 문주(文周)의 여(女)이시며,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종질녀(從姪女)이시다.

  장자(長子)는 휘(諱) 책(策), 판전교 소윤(判典校 少尹) 청송감무(靑松監務)로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이시고, 차자(次子)는 휘(諱) 잠(箴), 전주목사(全州牧使), 남경유수(南京留守)시며, 서(壻)는 평리(平理) 윤지겸(尹知謙)으로서, 이자(二子)를 두시니 원성백(原城伯) 개국공신(開國功臣) 기신(起莘)이고, 좌찬성(左贊成) 흥신(興莘)이시다.

  분묘(墳墓)는 실전(失傳) 미상(未詳)으로 시조(始祖) 문혜공(文惠公) 묘역(墓域) 아래 설단(設壇)에 봉사(奉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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