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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헌공(수)12세

수성최씨(隋城崔氏) 후헌공(后軒公) 행장(行狀).

by "율문" 2019. 1. 29.

최수(崔燧)

수성최씨(隋城崔氏) 후헌공(后軒) 행장(行狀).

 

시 대 : 조 선

출 생 : 1621辛酉(광해13)

사 망 : 1691辛未(숙종17

경 력 : 대가[代加]교지(敎旨) 품계(品階) 정5통덕랑(通德郞)

직 업 : 학자(學者) 문인(文人)

성 별 :

형 제 : () () (), () () ()

본 관 : 수성(隋城)

 

본관은 수성(隋城)이시며 자()는 명숙(明叔) ()후헌(后軒) ()는 수()이시다.

조고(祖考)의 자()는 급고(汲古) ()는 양호(楊湖) ()는 급() 학자(學者) 문인(文人)이시고5통덕랑(通德郞)이시다.

부친(父親)의 자()는 영백(榮伯) ()는 궐산(蕨山) ()는 길원(吉元) 학자(學者) 문인(文人)이시고5통덕랑(通德郞)이시.

배위(配位)초계정(草溪鄭)()는 사마(司馬) ()원길(元吉)이시며, ()는 휘()(), 증조(曾祖)는 참의(參議) () 예남(禮男)이시다. 배위(配位)선산김씨(善山金氏) ()는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 ()이시며, ()는 휘()계남(繼南)이시고, 증조(曾祖)는 선전관(宣傳官) ()사용(士勇)이시다.

배위(配位)평산신씨(平山申氏) ()는 휘()배명(配命)이시.

 

()께서는 1621(광해13)에 태어나시어 춘천(春川)의 후포촌(后浦村)에 살았기에 학자(學者)들이 후헌(后軒)이라 불렀다.

()은 천성이 간묵(簡黙)하시고 재주와 기량이 총명(聰明)하시므로 소년부터 사림(士林)간에 이름이 나셨으나 대소과(大小科) 십여 회에 다 참방(參榜)하지 아니 하시고 가라사대 내 양친(兩親)이 구몰(俱沒)하셨으니 누구를 위하여 영달(榮達)을 구 하리오 하시며 순전히 서적을 저술하시고 후학을 가르치시는데 힘을 쓰시었다.

()은 혹독한 추위와 심한 더위에도 쉬지 아니하시고 병환이 나시거나 노래(老來)가 되시어도 게을리 아니하시니 공()의 문하(門下)에서 배운 자는 누구나 다 성취(成就)하여 그 빛나고 빛난 문명(文明)이 묻지 아니하여도 선생의 제자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 지방에서 글을 숭상하는 선비가 많이 난 것은 공()의 재종숙(再從叔) 졸옹공(拙翁公)과 삼종(三從)형 출암공(朮菴公) 및 출옹(朮翁) 이주(李冑)씨 때로부터 시작 되었고, ()이 다시 그 뒤를 이으시와 무모한 풍속이 변하여 빛나고 빛나는 문향(文鄕)이 되시었다.

 

()은 자질(子姪)에게 권학(勸學)을 하는 방도를 엄격하게 하시되 엄동(嚴冬) 설한(雪寒)에도 밤을 새워 글을 읽히시니 날은 차고 방도 차서 옷에 있는 이와 벼룩이 얼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후헌공(后軒公)의 조카문과 사헌부감찰 하양현감 휘()태후(泰厚)사헌공(司憲公)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우리 형제들의 대소과경(大小科慶) 은 공()이 주신 덕이라 하시었더라.

 

()은 겨우 십칠세(十七歲)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국치(國恥)를 당한 날을 듣고 분개하여 나라 망함을 슬퍼하는 생각에서 말하기를 조정에 사람이 없어 교만한 오랑캐로 하여 마음대로 횡횡하게 하니 지금 이때에 다시 명나라를 마음에 간직한 자가 있겠는가 하고 눈물 흘려 울면서 분개(憤慨)하고 탄식(歎息)함이 듣는 이로 하여금 오래도록 감동(感動)하게 하였다. 또한 남의 착한 일을 칭찬하기를 좋아하신 반면에 남의 잘못을 숨기지 못하는 성품이시라 반드시 면담하여 책망을 하시되 흉금(胸襟)을 털어 놓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싫어하지 아니하도록 순순히 이르시어 누구나 원망하고 혐의하는 사람이 없게 하셨다.

 

우봉이씨(牛峰李氏)의 명조(名祖)인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공()이 저술하신 천인간물내외등서(天人間物內外等書)를 보고 탄식해 가로대 옛적 사람이 생각지 못한 깊은 뜻을 밝혔으니 오늘날 비로서 참된 글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 저술한 문집(文集)이 허다함으로 당시 선비들이 빌려보고자 하나 한권도 내 놓지 아니하시니 어떤 사람이 그 연유를 물은즉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책은 나 혼자만이 즐겨볼 뿐이요 만일 다른 사람이 보면 반드시 잘하고 못한 것을 논평할 것이니 나 혼자서 즐겨하는 것을 가지고 남의 시비사이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하심으로 유고(遺稿) 三十여권을 쓰셨으나 전하지 못하다가 종가(宗家)의 화재(火災)로 전부 소실(燒失)이 되었으니 어찌 애통하고 아깝지 아니하리오.

 

()께서는 몸이 늙고 쇠약(衰弱)하시어 1691(숙종17) 향년 71세 에 졸()하시어 가덕산 아래 원통산(元通山)에 묻히시었다.

이 산()의 전설(傳說)로서 유명한 정승이 풍수지리에 밝은 지관(地官)으로 하여금 춘천(春川) 지방(地方)에 조상의 묘() 명당(明堂)자리를 찾기 위하여 봉의산(鳳儀山)에서 비들기 3마리를 날리도록 하였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삿갓봉 아래로 날아가 앉음으로 가덕산 줄기를 따라 명당자리를 찾아 내려오던 중 이미 최씨(崔氏) 집안에서 상여(喪輿)에 회 닫는 소리가 나므로 아차! 한발 늦었구나! 원통하고 또 원통하도다!”하며 주먹으로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에 주먹자리가 새겨진 전설(傳說)로 원통산(元通山)이라 불리어 오다.

 

()은 공()의 빙부(聘父) ()()께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재직하실 때 대가(代加) 정5(正五品) 통덕랑(通德郞) 교지(敎旨)를 받으시었다.

 

()께서는 3을 낳으셨는데 배위(配位)초계정(草溪鄭)로부터 장자(長子)()태계(泰階)와 배위(配位)선산김씨(善山金氏)로부터 차자(次子)()태우(泰宇) 또한 배위(配位)평산신씨(平山申氏)로부터 3(三子) ()태숭(泰崇)을 두시었다.

 

묘소(墓所)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 산 42번지 원통산(元通山) 첨악공(瞻嶽公) 묘소(墓所) 우측 언덕아래 건좌(乾坐) 3(三封)으로 배위(配位)초계정(草溪鄭)배위(配位)선산김씨(善山金氏)모시었으며 배위(配位)평산신씨(平山申氏)는 공()의 좌측 100() 뒤 산 기슭에 유좌(酉坐)모시어 있다.

시제(時祭)201544일 첨악공(瞻嶽公) 후손 합동위패(合同位牌) 봉안(奉安)시 함께 모시어 음력1005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奉行)하다.

 

 

 

2019(己亥)

찬성공파(贊成公) 후헌공(后軒) 행장(行狀) 저자(著者)

찬성공파(贊成公) 후헌공(后軒)종중 회 장 10세손(世孫) ()율문(栗文) 관혁(寬爀)

       종 손 겸 총무이사 12세손(世孫) ()우생(又生) 덕희(德喜) 공동(共同) 수정(修正) 편찬 [編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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