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은 1432年 임자(壬子) (세종 14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자(天姿)가 탁월(卓越)하고 문장과 학술이 깊었으며 병법(兵法)에 능통, 무예가 남들보다 뛰어나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고 지행(志行)이 고결(高潔)하여 모든 사람이 경외(敬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증조고(曾祖考)인 봉암공(鳳巖公)의 대의명사(大義明事)하고 자인공검(慈仁恭儉)한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공정(公正)과 청백(淸白)을 처세지방(處世之方)으로 삼았다.
공(公)이 말하기를 역시 운명(運命)이로다 안으로는 행오(行伍)를 맡고 밖으로는 군민(軍民)에 임할 적에 무반(武班)은 천한 것이라고 하여 조금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빛이 없이 벼슬에 거하면서 항상 속에 쌓아두고 재능(才能)을 펴지 못한다고 하여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말하기를 다행히 무사(無事)한 세상에 태어나서 허물과 욕됨이 없으면 만족한 그것이라고 하고 다만 청렴(淸廉)하고 고요하게 처신(處身)하니 그분의 국량(局量)을 아는 자가 없었다.
공(公)은 첫 초임지로 5위(五衛) 사정(司正)으로 임명(任命) 부임(赴任)하고 연일 현감에승진(昇進) 부임(赴任)하였으며강령(康翎) 전행판관으로부임(赴任)하였을 때 이시애(李施愛) 난이 함길도(咸吉道) 길주 지방에서 일어나자 함길도(咸吉道)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이 황해도(黃海道)에 있는 병역을 충군 할 것을 세조(世祖)께 요청하여 공(公)은 토벌군 강순(康純) 진북대장(鎭北隊長) 휘하 관군(官軍) 지원군으로 문천(文川) 지역에 파견되어4개월 만에 진압(鎭壓)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시애(李施愛) 난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공(勛)을 세움으로써 함종(咸從), 병마만호(兵馬萬戶)로 승진(昇進)하여 치안 수비지휘관으로 부임(赴任)하고 정3품 통정대부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이르렀다.
공(公)은 김종직(金宗直)과 사돈(査頓) 간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로지 언의(言議)만 숭상하고 순진하고 옹졸함을 힘쓰지 않으며 너무 모서리를 드러내고 책임이 돌아오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화(禍)를 취하는 길이라 하니 김종직(金宗直)이 듣고 말하기를 도가 있는 말씀은 내가 미치지 못할 보라 하더니 뒤에 마침 낭패가 세상에 행하게 한 것은 선비들이 서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 뒤에야 공(公)이 근심하기를 깊이 한 것이 까닭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公)은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재직하다가 몸이 쇠약(衰弱)하여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가재리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여생(餘生)을 책으로 소일하다가 1486年 병오(丙午) (성종17) 九月 二十四日 향년 54세 일기로 졸(卒)하다.
공(公)은 수성최씨(隋城崔氏)六世 유항(有恒) 찬성공파(贊成公派) 一世로 하는 파조(派祖)이다.
공(公)은 평택 고을 가재마을에 세거지(世居地)를 형성(形成)하므로 후손(後孫)들이 대대손손(代代孫孫) 생활터전이 되었으며
공(公)의 한옥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아흔아홉 칸의 대궐(大闕)같은 집에 머슴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5代가 한집에 같이 살아왔다.
지방(地方)에서 이 마을을 지나 과거시험(科擧試驗)을 보러 가던선비들과 지나가던 과객(過客)들이 종종 하룻밤을 묵어가곤 하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과객(過客)중에 하룻밤을 묵던 지관(地官)이 이 집을 유심히 살펴보고 난 후 “이 집은 대단한 명당(明堂)자리 올 시다” 하면서 북(北) 동(東) 방향을 쳐다보며 “저 자리에 묘(墓)를쓰면 정승(政丞)판서(判書)와 같은 많은 인재(人才)들이나올 것입니다.”라고 하며 일러 주었다.
장남(長男)방촌공(芳村公)은 지관(地官)이알려준 명당(明堂)자리에 부모(父母)님을 모시었으며 그 후 후손(後孫)들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많은 인재(人才)들이배출되었다.
공(公)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시어 수십 년간 이 집안을 최대감댁(崔大監宅)이라 불리어 오던 것을 후손(後孫)들의 뜻에 따라 1632年(인조 10년)부터 찬성공(贊成公) 대감댁(大監宅)이라불리어 내려왔다.
1849年 헌종(15년) 수성최씨(隋城崔氏) 족보 전 기유보(前 己酉 譜) 편찬할 때 유항(有恒)의 증손(曾孫) 첨악공(瞻嶽公)의 8세손(世孫) 사성 제공 광련(光鍊)이 400년간(年間) 찬성공(贊成公) 대감댁(大監宅)집안으로 불려오는 전설(傳說)에 따라 六世 유항(有恒)을 찬성공파(贊成公派) 일세(一世) 파조(派祖)로 모셔야 한다는 후손(後孫)들의 의견(意見)에 따라 족보(族譜)에 찬성공(贊成公)으로 등재(登載)하면서 찬성공파(贊成公派)가 되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평택시 가재동 산 58-1 유좌(酉坐) 쌍봉(雙封)
으로 매년 음 10월 2日에 묘소에서 세일사(歲一事)를 봉행하다.
서기(西紀) 2019년 (己亥) 2월 14일
글쓴이
찬성공(贊成公)파 종중 회장 호(號)는 율문(栗文) 관혁(寬爀)과호(號)는 우생(又生)덕희(德喜)공동(共同) 수정(修正) 편찬(編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