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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공파(유항)6세

수성최씨 찬성공(유항) 행장록 편

by "율문" 2024. 6. 5.

최유항(崔有恒)

隋城崔氏 贊成公

 

시대 : 조선

: 1432년 임자 (세종14)

: 1486년 병오 (성종17)

경력 : 사정. 현감. 판관. 만호. 목사. () 이조판서

직업 : 문신

성별 :

본관 : 수성(隋城)

 

개 설

()의 본관은 수성(隋城) ()는 자상(子常) ()는 유항(有恒)이며, 증조고(曾祖考) 봉암공(鳳岩公) ()는 원개(元凱) 고려 정2품 광록대부(光祿大夫)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이고 조고(祖考) ()는 책() 청송감무(靑松監務) 대부소윤(大府少尹) 3품 정의대부(正議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지냈으며 부친의 휘()는 경() ()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이다.

 

배위(配位)는 증() 정부인(貞夫人) 거창신씨(居昌愼氏) () ()는 선갑(先甲) 4품 조봉대부(朝奉大夫) 영월군수(寧越郡守)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경력 사항

()1432임자(壬子) (세종 14)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자(天姿)가 탁월(卓越)하고 문장과 학술이 깊었으며 병법(兵法)에 능통, 무예가 남들보다 뛰어나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고 지행(志行)이 고결(高潔)하여 모든 사람이 경외(敬畏)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증조고(曾祖考)인 봉암공(鳳巖公)의 대의명사(大義明事)하고 자인공검(慈仁恭儉)한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공정(公正)과 청백(淸白)을 처세지방(處世之方)으로 삼았다.

 

() 조선(朝鮮) 시대(時代) 문과(文科)와 무과(武科) 시험(試驗)에 응시하였는데 무과(武科)초시에(初試)서 일()으로 갑과(甲科)급제(及第)하였다.

()이 말하기를 역시 운명(運命)이로다 안으로는 행오(行伍)를 맡고 밖으로는 군민(軍民)에 임할 적에 무반(武班)은 천한 것이라고 하여 조금도 달갑게 여기지 않은 빛이 없이 벼슬에 거하면서 항상 속에 쌓아두고 재능(才能)을 펴지 못한다고 하여 게으름 피우지 않고 말하기를 다행히 무사(無事)한 세상에 태어나서 허물과 욕됨이 없으면 만족한 그것이라고 하고 다만 청렴(淸廉)하고 고요하게 처신(處身)니 그분의 국량(局量)을 아는 자가 없었다.

 

()첫 초임지로 5(五衛) 사정(司正)으로 임명(任命) 부임(赴任)하고 연일 현감에 승진(昇進) 부임(赴任)하였으며 강령(康翎) 전행판관으로 부임(赴任)하였을 때 이시애(李施愛) 난이 함길도(咸吉道) 길주 지방에서 일어나자 함길도(咸吉道)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황해도(黃海道)에 있는 병역을 충군 할 것을 세조(世祖)께 요청하여 공()은 토벌군 강순(康純) 진북대장(鎭北隊長) 휘하 관군(官軍) 지원군으로 문천(文川) 지역에 파견되어 4개월 만에 진압(鎭壓)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시애(李施愛) 난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함종(咸從), 병마만호(兵馬萬戶)로 승진(昇進)하여 치안 수비지휘관으로 부임(赴任)하고 정3품 통정대부 안주목사(安州牧使)에 이르렀다.

 

()은 김종직(金宗直)과 사돈(査頓) 간이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로지 언의(言議)만 숭상하고 순진하고 옹졸함을 힘쓰지 않으며 너무 모서리를 드러내고 책임이 돌아오는 것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화()를 취하는 길이라 하니 김종직(金宗直)이 듣고 말하기를 도가 있는 말씀은 내가 미치지 못할 보라 하더니 뒤에 마침 낭패가 세상에 행하게 한 것은 선비들이 서로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 뒤에야 공()이 근심하기를 깊이 한 것이 까닭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은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재직하다가 몸이 쇠약(衰弱)하여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고 경기도 평택군 송탄면 가재리 향리(鄕里)로 돌아와서 여생(餘生)을 책으로 소일하다가 1486병오(丙午) (성종17) 九月 二十四日 향년 54세 일기로 졸()하다.

 

()의 자녀(子女)11두고 남() ()는 방촌(芳村)이고 휘()는 윤명(潤明)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이다. ()은 선산김씨(善山金氏) 이조좌랑(吏曹佐郞) 정자(正字) 김숙형(金叔馨)에게 출가(出嫁)하였다. {: 내 자(內資 寺) 3품 중직대부(中直大夫) 부정(副正) () 정승(正承)}

 

 

 

증직(贈職)

()의 손자(孫子) 언경(彦卿) 최보한(崔輔漢)이 을사사화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수산군(隨山君)에 봉해졌으며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참찬(右參贊) 1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으로 재직할 때 공()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 되었다.

 

 

찬성공파(贊成公) 유래(由來)

 

수성최씨(隋城崔氏) 六世 유항(有恒)

()은 수성최씨(隋城崔氏) 六世 유항(有恒) 찬성공파(贊成公) 一世로 하는 파조()이다.

 

()은 평택 고을 가재마을에 세거지(世居地)를 형성(形成)하므로 후손(後孫)들이 대대손손(代代孫孫) 생활터전이 되었으며

()의 한옥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아흔아홉 칸의 대궐() 같은 집에 머슴을 수십 명씩 거느리고 5가 한집에 같이 살아왔다.

지방(地方)에서 이 마을을 지나 과거시험(科擧試驗)보러 가 선비들과 지나가던 과객()들이 종종 하룻밤을 묵어가곤 하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과객() 중에 하룻밤을 묵던 지관(地官)이 이 집을 유심히 살펴보고 난 후 이 집은 대단한 명당(明堂)자리 올 시다하면서 북() () 방향을 쳐다보며 저 자리에 묘() 쓰면 정승(政丞) 판서(判書)와 같은 많은 인재(人才)들이 나올 것입니다.”라고 하며 일러 주었다.

장남(長男) 방촌공(芳村公)지관(地官) 알려준 명당(明堂)자리에 부모(父母)님을 모시었으며 그 후 후손(後孫)들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며 많은 인재(人才)들이 배출되었다.

 

()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시어 수십 년간 이 집안을 최대감댁(崔大監宅)이라 불리어 오던 것을 후손(後孫)들의 뜻에 따라 1632(인조 10)부터 찬성공(贊成公) 대감댁(大監宅)이라 불리어 내려왔다.

 

1849헌종(15) 수성최씨(隋城崔氏) 족보 전 기유보(前 己酉 譜) 편찬할 때 유항(有恒)증손(曾孫) 첨악공(瞻嶽)8세손(世孫) 사성 제공 광련(光鍊)400년간(年間) 찬성공(贊成公) 대감댁(大監宅) 집안으로 불려오는 전설(傳說)에 따라 六世 유항(有恒)을 찬성공파(贊成公) 일세(一世) 파조(派祖)로 모셔야 한다는 후손(後孫)들의 의견(意見)에 따라 족보(族譜)에 찬성공(贊成公)으로 등재(登載)하면서 찬성공파(贊成公)가 되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평택시 가재동 산 58-1 유좌(酉坐) 쌍봉(雙封)

으로 매년 음 102에 묘소에서 세일사(歲一事)를 봉행하다.

 

서기(西紀) 2019(己亥) 214

찬성공(贊成公)파 회장 시은공(隱公)종중 회장 ()는 율문(栗文) 관혁(寬爀) ()는 우생(又生) 덕희(德喜) 공동(共同) 수정(修正) 편찬(編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