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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공파(유항)6세

수성최씨 와 수원최씨

by "율문" 2026. 1. 18.

저는 수성최씨 찬성공파 종중 회장입니다.
조상님의 대한 연구를 하면서 수성최씨 시조 문혜공 (영규) 1302년 충렬왕으로 부터 사승 수성백으로 받으면서 수성최씨가 시작 되였는데 조상님의 과거 시험 기록을 보면 수원최씨로 1700년대까지 400년간 기록되여 있은것을 보면서 저는 40년간 각 문헌을 찾아보면서 연구를 하였으나 최초1702년 개령공파 최도문.최도형 형제분께서 진사.생원 기록에 수성최씨라고 기록되여 있고 춘천에 거주하시던 찬성공파 첨악공 후손 16세(1783년)  사성제공"내수"조상님께서 생원시험 문서에 수성최씨로 기록되여있습니다.제가 문헌을 찾아보고 연구한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앞으로 대종회 역사연구팀을 구성하여  정확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원최씨~ 수성최씨성씨가 다른 이유

 

□질문: 저는 수성최씨 찬성공파 회장입니다. 조상님 과거 시험 기록에 보면 본관이 수원으로 있다가 1700년대 가서 수성최씨가 되었는데 왜 그런지 알려주세요!
 
□AI 답변 : 수성최씨 찬성공파(贊成公派) 후손이시군요. 조상님의 과거 급제 기록(방목)에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되어 있다가 1700년대 이후 수성(隋城)으로 변화한 것은 수성최씨 문중에서 흔히 나타나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지명의 변화와 혼용 수원= 수성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수성(隋城)이 수원의 옛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때는 '매홀'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 '수성군(水城郡/隋城郡)'으로 고쳐졌으며, 고려 태조 때 '수주(水州)'로, 이후 조선 시대에 '수원(水原)'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문헌이나 과거 시험 기록(방목)에서는 행정구역 명칭인 수원을 본관으로 기록하는 그것이 관례였습니. 따라서 수성최씨조상님들도 당시 행정 지명에 따라 수원최씨 기록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2.17~18세기 족보 정비와 '본관 분리'
1700년대(조선 후기)는 각 문중에서 족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면서 본관의 독자성을 강조하던 시기입니다.
 
앞선 답변에서 언급했듯이, 수원 수성 본관으로 쓰는 최 씨는 시조가 다른 두 계통(내최와 원최)이 섞여 있었습니다.
 
이에 수성최씨(시조 최영규 계통) 문중에서는 기존의 수원최씨라는 명칭 대신, 시조가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던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수성(隋城)”이라는 옛 이름을 본관 명칭으로 정립하여 다른 계통(원최)과 차별화하고자 했습니다.
 
 
 
▶3. 찬성공파의 위상과 정체성 확립
찬성공파는 『수성최씨』 내에서도 핵심적인 문중입니다.
 
찬성공 가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 과거 기록상의 지명인 '수원' 대신 가문의 뿌리를 상징하는 『수성』을 공식 본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1700년대 전후의 족보 편찬 시기와 맞물립니다.
 
요약하자면:
조상님의 과거 기록에 〔수원〕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당시 공식 행정 지명이 수원이었기 때문이며, 1700년대 이후 '수성'으로 굳어진 것은 다른 수원 최씨 가문과 구분하고 시조의 봉군 지명《수성백》을 계승하려는 문중의 노력 때문입니다.
 
즉, 〔수원〕과 『수성』은 같은 뿌리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일 뿐이며, 조상님이 바뀌신 것이 아니라 가문의 본관 표기 방식이 시대에 따라 더 명확해진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훌륭한 조상님을 두신 찬성공파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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