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최희량장군편

"율문" 2016. 6. 24. 21:10

 

시대 조선
출생일시1560년(명종 15)
사망일시1651년(효종 3)
경력 흥양현감
유형 인물
관련 사건 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업 무신
작품/저서 일옹문집
성별
분야 역사/조선시대사
본관 수성(隋城)
별칭<자>경명(景明), <호>일옹(逸翁), <시호>무숙(武肅)

요약 1560(명종 15)∼1651(효종 3). 조선 후기

                             


    최희량 장군 신도비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큰 공을 세운 최희량의 일대기를 적은 신도비. 전체 높이 280㎝. 전라남도 기념물 제53호.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소재.


    본관은 수성(隋城).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아버지는 영릉참봉(英陵參奉) 최영(崔瀛)이다.

           

    큰 체구에 용모가 뛰어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다음, 당시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있으면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1604년 논공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일옹문집』 2권 1책이 있다.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최희량(崔希亮)

    성명(姓名)

     최희량(崔希亮)

    본관(本貫)

      수원(水原)

    시대(時代)

    1560(명종 15)∼1651(효종 3)

    자(字)

    경명(景明)

    호(號)

    일옹(逸翁)

    이력(履歷)

    1560(명종 15)∼1651(효종 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영릉참봉(英陵參奉) 영(瀛)의 아들이다.

    큰 체구에 용모가 뛰어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무예를 익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 싸우지 못하였고,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다음, 당시 충청수사로 있던 장인 이계정(李繼鄭)을 돕도록 천거되어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흥양현감(興陽縣監)으로 있으면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 번 전공을 세워 이순신의 격찬을 받았으나,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1604년 논공에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아들을 보내어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게 하였다.

    저서로는 《일옹문집》 2권 1책이 있다.

    1774년(영조 50)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800년(정조 24) 나주 향인들이 지은 사당에 이순신과 함께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經山集. 〈李泰鎭〉

     

     

    최희량(崔希亮)은 武將으로 호는 逸翁 수원인

       逸翁文集(奎1647), 崔希亮(朝鮮)著.

              2卷 1冊 古活字本 33×21.5cm.

              四周單邊 半郭:25.2×17.2cm.

              10行 21字 注雙行.

              版心:上花紋魚尾.

         逸翁 崔希亮(1560∼1651)의 詩文集. 후손인 麟國이 1846년(正祖  24)에  刊行하였다. 崔希亮은 武將으로 호는 逸翁이다. 1597년(宣祖 30)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宣傳官으로 李舜臣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다. 그 후 露梁 싸움에서 李舜臣이 전사하고 난  뒤, 벼슬을 버리고 羅州로 돌아갔고, 1604년 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어 嘉善大夫에  올랐다. 사후인 1774년(英祖 50)에는 兵曹判書에 追贈되었고 1800년(正祖 24)에는 羅州에  李舜臣과 함께 配享되었다.  첫 머리엔 吳致愚와 張憲周의 序文이 있다. {卷1}:詩  105수와 雜著로 種菊歌, 生辰贈兒, 家廟立議, 費隱亭記, 先조小祥陳情記,  兩喪居憂事蹟記  등. {卷2}:附錄으로  遺事·行錄·神道碑銘·謚狀·破倭報捷本狀·報捷跋·請褒疏·宣武原從一等功臣錄卷·贈職顚末·遺編後敍 등. {卷1}은 逸翁 자신이  쓴  詩文이고  {卷2}는 後代의 기록으로 逸翁의 生前의 사적과, 사후 공신·贈職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또 卷末의 「遺編後敍」는 이 책 발간 당시에 編入된 것으로 安致宅과 5代孫 崔齊東이  기록한 것이다. 이 책은 詩文集으로서의 가치보다는 壬辰倭亂의 방계 史料로서의  한  文獻이 된다. 아울러 一等功臣의 행적을 알려 주는 傳記的 의미도 지니고 있다.

    묘(墓)

    최희량장군 신도비 (崔希亮將軍 神道碑)

    지정번호    : 기념물 제53호

    소유자       : 사  유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369

    규모          : 총높이 280㎝

                    비신 높이 245㎝

                    비 너비 118㎝

    재료          : 화강암

    시대          : 1901년

    지정연월일 : 1981년 10월 20일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무장으로 큰공을 세운 최희량 장군(將軍)의 묘역(墓域) 근처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이다. 비 제목(題目)은 해서(楷書)로 ꡒ증병조판서무숙공수성최일옹신도비ꡓ라 기록(記錄)되어 있다. 비문(碑文)을 지은 사람은 ꡒ가선대부(嘉善大夫)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겸(謙)성균관(成均館)제주(祭酒)세자(世子)시강원(侍講院)찬선덕은 송치규ꡓ인데, 여기에 후일 송치규의 현손인 송지헌이 기록한 ꡒ추기ꡓ가  첨가되어 있다. 그 ꡒ추기ꡓ에 기록된 광무(光武) 5년(1901) 8월이 곧 이 신도비(神道碑)의 건립 연대이다. 그리고 건립자는 최희량 장군의 8세손 참봉(參奉) 귀한, 9세손 기춘, 기정, 10손 우현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비 형태는 자연석의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최희량 장군은 명종(明宗) 15년(1560) 나주(羅州)에서 참봉(參奉) 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경명, 호(號)는 일옹 또는 와룡,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이다. 선조(宣祖) 27년(1594) 그의 나이 35세 때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빙부인 충청(忠淸)도 수군절도사의 추천(推薦)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丁酉)재란이 일어났을 때 흥양현감으로 재직(在職)하면서 이순신장군의 휘하(麾下)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노량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戰死)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落鄕)하여 조용히 지내다 효종(孝宗) 2년(1651) 생애(生涯)를 마치었다.

     선조(宣祖) 37년(1604) 선무원종공신1등에  책록,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영조(英祖) 50년(1774) 병조판서(兵曹判書)  에 추증(追贈)되고, 순조(純祖) 11년(1811)에 무숙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가 남긴 『파왜보첩』은 임란사의 중요한 사료로 보물(寶物)(660호)로 지정(指定)되었으며, 유저로는 『일옹문집』이 전하고 있다.

    부(父)

     

    모(母)

     

    배(配)

     

    자(子)

     

    녀(女)

     

    형제(兄弟)

     

    문헌(文獻)

      1.최희량임란첩보서목(崔希亮壬亂捷報書目)(1560명종16~1651효종3)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흥양(興陽:高興郡) 현감(縣監) 최희량(崔希亮:호 逸翁)이 통제사(統制使)에게 올린 보고서.1첩.보물(寶物) 제660호.광주직할시 최윤도(崔潤度)소장. 부속자료로 교지(敎旨)·시호망(諡號望) 등 고문서(古文書)가 첨가되있다. 이서목은 임진왜란 당시 희귀한 보첩문서(報捷文書)로서 임진전란사 연구(硏究)에 귀중한 자료(資料)이다. 통제사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제송문(題送文)과 수결(手決)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