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최씨 5세 안양공 6세 수성군
5세 안양공 최경(崔涇)
생몰년 미상이며 4세 책(策)의 장손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에 들어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 사정(司正)이 되었고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수성군(純忠補助功臣 資憲大夫 兵曹判書 隋城君)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안양(安讓)이다. 배(配)는 정부인 선산김씨(貞夫人 善山金氏)이고,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최유림(崔有臨) 정충적개공신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수성군(精忠敵愾功臣 贈 資憲大夫 兵曹判書 隋城君) 시(諡) 안양(安襄), 차남 최유용(崔有容)은 가산군수(嘉山郡守)역임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삼남 최유항(崔有恒)은 안주군수(安州郡守)역임 증(贈) 숭정대부 좌찬성 (崇政大夫 左贊成), 사남 최유근(崔有根)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하였다. 묘(墓)는 평택시 도일동 산 110번지이다.
6세 수성군(隋城君) 유림(有臨)
수성군 최유림은 5세 최경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무에 출중하였으며 24세 경오년(1542)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를 역임 하였다.
세조 13년(1467년)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중앙 집권 체제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최유림 장군은 토벌작전에 참여하여 대승을 거두고 이 공로로 정충적개공신이 되었다. 그 해 명나라 북방을 여진족 추장 이만주가 침범하니 조선에서 명나라를 도우려 지원군이 출병한다. 이 전쟁에서 최유림 장군이 또 한번 큰 공을 세운다.
이에 1468년 병조참판 수성군에 봉해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1년 병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왕이 어의를 보내 치료토록 했으니 왕의 총애가 각별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니 당시의 임금인 성종께서 병조판서로 추증하고, 안양공이란 시호를 내렸다. 화목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은 것을 안(安)이라 하고 갑주(甲胄) 에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한다. 이후 평택시 오좌동은 수성 최씨 안양공파의 요람이 되었으며 수성군 최유림 장군의 사당과 묘는 평택시 향토유적 제 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공의 묘 앞에는 시민의 산책길인 부락산 둘레길이 이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