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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위패봉안 안내

수성최씨 찬성공파 첨악공 (첨악제)

by "율문" 2016. 4. 28.








『수성최씨 瞻嶽公(世龍) 선생의 약력 소개』

  선생의 휘는 세용(世龍)이요 호는 첨악(瞻嶽)이라 하시니, 시은공(숭한) 선생의 막내 아드님으로서 조선왕조 11대왕 중종 때 태어나시어 인종, 명종시대에 사시면서 천성이 평화로우시고 지조가 고상하시와 문아(文雅:시문을 짓고 읊는 풍치)에 재능이 있으시고, 덕이 있으시므로 착한 사람을 보시면 좋이 여기시며 날로 사귀시는 친분이 있고, 악한 사람을 보시면 미워하시되 규각을 내지 않으시니, 사람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더라.
 공께서도 4세9일전에 기록 되여 후세에 전해 오듯이 역시 은일(隱逸:속세를 떠나 숨어 지냄)로 나라에서 돈영(敦寧)참봉(參奉 )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으시고 그 후 다시 제릉(齊陵)참봉에 천망 되셨으나 받지 않으시고 은둔생활하시면서 후학을 가르치는데 소일셨다. 또한 조정에서 사헌부 사간원에 천망(薦望)되셨으나 공은 이미 별세를 한 후였다.
" 부인으로는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기(李芑)의 아우님이신 좌의정 이행(李荇)의 따님(덕수이씨)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이율곡선생이 재종질 이기도 하다. "
공은 평소에 그 장인 되시는 좌의정 이행(호:용재, 시호:문헌)에게 간혹 문안을 가시되 오래 그곳에 머므르지 않으시고 돌아오시니 그 이유는 형님으로 당시  을사사화의 공신 이기(1549년 영의정)를 꺼려, 미워 하심이니 그 바른것을 지키는 지조가 이러 하셨다. 임진왜란 당시 가족과 여러 일가들을 거느리시고 춘천으로 오셔서 고란(고탄)과 모애산골로 다니시며 기미를 보고 대처하시므로 한사람도 잃지 아니하고, 임기응변을 잘 하시와 한 사람도 실패 없이 지내시므로 인근친지가 많이 돌아와서 의지하니 공의 사형제분 자손이 가평, 춘천, 홍천에 살고 있는 호(戶)수가사오백호를 넘으며 삼사백년 동안에 대소 과경에 삼십 여장이요 저명한 문사(文士)가 많이 나시니라.
공께서는 아드님 10세급(양호공), 손주 11세 길원(궐산공)흥원, 증손주 12세 (정.수.필.습) 고손주 13세 (태동, 태항, 태제, 태계, 태우, 태숭, 태후, 태정, 태중, 태용, 태율)에서 현제 25세까지 이어 오면서 많은 자손이 전국에 분포되어 살고 있음이니라.
※위 약력은 수성최씨 대동보 행장록에 기록 된 문원을 요약하여 작성하였음.

 

수성최씨 첨악공(세용) 부인 덕수이씨 가계도



임진왜란(한국 한자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 일본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임진란, 임란이라고도 부른다. 두 번의 침입이 있어서 제2차 침략은 정유재란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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