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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풍양조씨 시호. 공숙(恭肅) 공 조익정(趙益貞) 수성최씨(숭한)처가집

by "율문" 2016. 5. 27.

풍양조씨 시호는. 공숙(恭肅) 공 조익정(趙益貞)

 

                                                             인동 장달수 편

 

 

조익정(趙益貞) 1436년(세종 18)∼1498년(연산군 4)

시호: 공숙(恭肅) 執心堅固曰恭。剛德克就曰肅。

일을 공경히 하고 위를 받드는 것이 공(恭)이고

강직한 덕(德)으로 능히 이룬 것을 숙(肅)이라 한다

봉호: 한평군(漢平君)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이원(而元).

 

공조좌랑 안평(安平)의 손자로, 한산군(漢山君) 온지(溫之)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5년(세조 1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1466년 《동국통감》의 편찬에 수찬낭관으로서 참여하였다.

1467년 예문관봉교‧승정원주서를 지냈고, 1468년(예종 즉위) 10월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69년 사헌부지평‧행 세자시강원문학을 거쳐 춘추관수찬관으로 《세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고, 1470년(성종 1) 형조참의가 되었다.

1481년에 한성부좌윤으로 한평군(漢平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

1489년 호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다시 대사헌‧예조참판‧경상우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1494년 12월 사은사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성종의 죽음으로 중지하였다.

1495년(연산군 1) 한성부좌윤, 같은해 8월 공조참판, 1497년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임하고, 1499년 춘추관동지관사(春秋館同知館事)로 《성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하였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성종대의 문예에 공헌하였다.

 

유명조선국 수충정난(輸忠定難) · 익대공신(翊戴功臣) 증(贈)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시(諡) 공숙(恭肅) 행 가정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평군(漢平君) 조(趙)공 신도비명 병서(幷序)

 

외(外) 5대손 분충 찬모 정사 갈충 효성 병기 영사공신(寧社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익녕부원군(寧府院君) 홍서봉(洪瑞鳳)이 글을 짓고,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전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감-춘추관사 세자부(前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世子師) 김수항(金壽恒)이 전서하다.

 

서봉(瑞鳳)은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는데, 외할머니 민(閔)씨 부인이 여러 손자들에게 이르는 말씀을 자주 들었다. 말씀하시기를, “이 할미의 외증조이신 한평군(漢平君) 자손들이 근세에 번창한데, 드문 일이다. 여러 명문가들과 견주어보면, 다른 가문들은 처음에 잘 되어 아들과 손자에 전한다 하더라도, 여러 대가 지나도록 그 가문을 지켜갈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외증조께선 좋은 일을 많이 하셔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셨으며, 덕 쌓기를 후하게 하시고 복 드러내기를 크게 하셨다. 그 은덕이 아주 오래 되었음에도 너희들에게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알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서봉(瑞鳳)은 그때 아직 나이가 어려 듣기만 하고 그 까닭은 자세히 묻지 못하였다. 계미년(인조 21, 1643년) 가을, 고성(高城)군수 조직(趙溭)이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찾아와 “선조 공숙(恭肅)공께서 돌아가신 지 백여 년이 지나도록 무덤길에 전각한 비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후손들이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여러 종족(宗族)들이 모여 서로 의논하기를, ‘지금 후세에 남길 정도의 글을 지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자손이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으로 짓는 것만 하겠는가? 지금 여러 자손 중에 상공(相公)만이 연세와 벼슬이 가장 높고, 대제학까지 겸해서 맡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한다는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습니다. 상공(相公)께선 이를 헤아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재간이 없는 내가, 공숙(恭肅)공의 덕업을 글로 제대로 밝혀 드러낼 수 없음을 저어하여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양해를 얻지 못하여 이 글을 짓는다.

 

조심스럽게 공숙(恭肅)공의 행장을 살피니, 공의 이름은 익정(益貞)이고 자는 이원(而元)이다. 선대는 한양부(漢陽府) 풍양현(豐壤縣) 사람이다. 시조인 맹(孟)은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운 공로로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재주 있고 현명하며 평판 좋은 벼슬한 사람들이 이어졌다. 염휘(炎暉)는 우부대언이요, 아들 신(愼)은, 회양부사(淮陽府使) 증사복시정으로 문하시중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딸을 맞이하여, 공조좌랑 증 병조참의인 안평(安平)을 낳았으니, 곧 공의 할아버지다. 안평(安平)은 개성부윤(開城府尹)인 허귀룡(許貴龍)의 딸을 맞이하여 용진현령 증 순충 보조공신 병조참판 한산군(漢山君) 온지(溫之)를 낳았다. 온지(溫之)는 예빈시 정 지제교인 해주(海州) 오축(吳軸)의 따님을 맞이하여, 정통(正統) 원년(세종 18, 1436년) 병진 10월 초 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18세 경태(景泰) 4년(단종 1, 1453년) 계유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화(成化) 원년(세조 10, 1465년) 을유년에 문과에 올랐다. 정해년(세조 12, 1467년)에 추천을 받아 한림원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주서로 옮겨 제수되었다. 무자년(세조 13, 1468년)에 익대공신(翊載功臣) 3등에 책봉되었고, 기축년(예종 1, 1469년)에 등급을 뛰어넘어 시강원 문학에 제수되는 등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쳤다. 재상의 반열에 오르자 규례에 따라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 외직(外職)으로는 경상우도와 함경남북도 절도사, 강원도 관찰사 등의 직을 지냈다. 계묘년(성종 14, 1483년)에 이조참판 벼슬을 받았으며, 한 해 뒤에 대사헌이 되었다. 무오년(연산군 4, 1483년)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로 인한 사화(史禍) 때문에 공조참판으로 좌천되었다가 돌아가셨다. 9월 7일은 돌아가신 날이다. 양주의 고주내 광암리(楊州 古州內 廣巖里)의 북쪽을 향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태상시에서 시호를 의논하여, “원래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견고히 하였으니 공(恭)이고, 강직한 덕을 잘 이루었으니 숙(肅)이다.”라고 하여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외모가 빼어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깊고 지조와 행실이 검소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올라 이름과 영예가 굉장하더니, 중년 이후로는 외직으로 오랫동안 빙빙 돌았다. 성종대왕께서 인재를 고르는데 뜻을 둠에 한마음으로 이조 참판에 뽑혀 임용되었으나 성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셨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상의 도는 크게 변하였고, 공도 나이 환갑이 넘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으니 아아! 슬프다.

 

공은 안동(安東) 권(權)씨 별제인 관(關)의 따님으로, 판관 상량(尙良)의 손이며 고려 도첨의 좌정승 문탄공(文坦公) 한공(漢功)의 6대손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 팽(彭)은 홍치(弘治) 8년 을묘년(연산군 1, 1495년) 진사 시험에서 일등을 하며,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요절하였다. 둘째 아들 이(耳) 또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은 형조정랑에 그치었다. 큰딸은 참봉 나세걸(羅世傑), 둘째딸은 군수 신명희(申命羲), 셋째딸은 수성최씨 세조8세손 (시은공) 최숭한(崔崇漢), 막내딸은 증 참판 권복생(權福生)에게 시집갔다.

 

진사 팽(彭)은 현감 이사손(李嗣孫)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종경(宗敬)은 정덕(正德) 15년 경진년(중종 15, 1520년) 문과에 급제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청렴하고 강직하여 한동안 중히 쓰였으나, 간신 김안로(金安老)의 일을 미리 성찰하여 그가 다시 조정에 들어오는 것을 힘껏 막은 일로, 김안로(金安老)의 무리들에게 내침을 당하여 향리에서 생을 마쳤다. 둘째 아들 종돈(宗敦)은 군자감 첨정이었다. 큰딸은 현령 조익수(曺益修), 둘째딸은 현령 한수온(韓守溫), 막내딸은 봉사 엄용공(嚴用恭)에게 시집갔다. 전한 종경((宗敬))은 아들만 셋으로, 장남 정건(廷楗)은 봉사, 둘째 아들 정추(廷樞)는 성균관 사예, 셋째 아들 정기(廷機)는 홍문관 응교이다. 첨정 종돈(宗敦)은 3남 4녀를 낳으니, 장남 정간(廷幹)은 의금부 경력, 둘째 아들 정권(廷權), 셋째 아들 정량(廷樑)이다. 큰딸은 이정로(李廷老), 둘째딸은 진사 김응생(金應生), 막내딸은 한개수(韓介壽)에게 시집갔다. 정랑 이(耳)는 군수 남조(南祚)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은 없다.

 

정건(廷楗)은 딸만 둘로, 큰딸은 별좌 김헌광(金獻光), 둘째딸은 학생 이동현(李東顯)에게 시집갔다.

정추(廷樞)는 1남 2녀로, 아들 수이(守彞)는 한풍군(漢豐君)의 봉직을 이어 받고 큰딸은 안여성(安汝誠), 둘째딸은 전적 윤홍립(尹弘立)에게 시집갔다. 수이(守彞)의 장남 직(溭)은 군수, 차남 옥(沃)은 현감이며, 딸들은 홍석노(洪碩老) · 김상신(金相臣) · 성윤(成潤) · 정창준(鄭昌浚) · 최태망(崔泰望) · 현감 홍재형(洪再亨)에게 시집갔다.

 

정기(廷機)는 3남 2녀로, 장남 수륜(守倫)은 좌랑, 둘째 아들 수익(守翼)은 홍문관 교리, 셋째 아들 수인(守寅)은 문과에 장원을 하였으며 정랑이며, 큰딸은 승원 황혁(黃赫), 둘째딸은 노경직(盧敬直)에게 시집갔다. 수륜(守倫)은 장남 척(滌), 차남 일(溢), 군수인 막내아들 속(涑)이 있으며, 딸들은 사포 권진(權鎭), 관찰사 이덕수(李德洙), 첨정 이원재(李原載)에게 시집갔다. 수익(守翼)은 아들만 셋으로, 장남 약(瀹), 차남 정사공신(靖社功臣) 상의원-정 흡(潝), 막내 현감 관(灌)이 있다. 수인(守寅)은 딸만 둘로, 큰딸은 현령 김계(金械), 작은딸은 봉사 황대명(黃大鳴)에게 시집갔다. 황혁(黃赫)은 딸 둘로, 큰딸은 왕자 순화군(順和君) 보, 작은딸은 군수 신희업(辛喜業)에게 시집갔다. 순화군(順和君)은 딸만 하난데, 판서 이경증(李景曾)에게 시집갔다.

 

정간(廷幹)의 아들 수일(守一)은 별좌이고, 딸들은 현감 이지(李沚), 군수 홍구상(洪龜祥)에게 시집갔다.

정권(廷權)은 아들로 수원(守元), 목사 수준(守準), 부정 수헌(守憲), 수관(守觀)이 있고, 수원(守元)은 아들 승지 즙(濈)이 있고 딸은 이원▨(李元▨)에게 시집갔다. 수준(守準)은 아들 업(澲)과 식(湜)이 있고, 딸들은 양림(楊琳), 송도택(宋途澤), 진사 이상길(李祥吉)에게 시집갔다. 수헌(守憲)은 아들 탁(濯) · 철(澈) · 오(澳) · 필(泌)이 있고, 딸은 이격(李格)에게 시집갔다.

 

조익수(曺益修)는 오직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찬 홍담(洪曇)에게 시집갔다. 아들 종복(宗福)은 관직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딸들은 군수 최덕순(崔德峋), 별좌 남황(南璜), 좌랑 신종원(辛宗遠), 판서 오억령(吳億齡)에게 시집갔다. 한수온(韓守溫)은 아들로 현감 현(顯), 기(頎), 사간 옹(顒), 봉사 의(顗)가 있으며, 딸들은 현감 유호(兪灝), 생원 최순민(崔舜民)에게 시집갔다.

 

나세걸(羅世傑)은 4남 1녀로, 장남은 옥(沃), 차남 식(湜)은 사림에 명성이 있고 호는 장음정(長吟亭)이고, 셋째아들 숙(淑)은 부제학으로 있다, 정미년에 비명에 죽었고, 넷째아들 익(瀷)은 전적이다. 딸은 가문의 보배로 금마 부수 면(勉)에게 시집갔다. 신명희(申命羲)는 자식이 없다.

 

최숭한(崔崇漢)은 4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세광(世光) · 세홍(世弘) · 감역 세웅(世雄) · 세룡(世龍)이며, 딸들은 증 참판 허령(許鈴), 군수 윤택(尹澤), 감찰 목함(睦諴)에게 시집갔다.

권복생(權福生)은 1남 1녀로, 아들은 부사 유경(有慶)이고, 딸은 참봉 민의(閔禕)에게 시집갔다.

나숙(羅淑)은 아들 윤평(允平)이 있고 딸은 봉사 이적춘(李迪春)에게 시집갔다.

나익(羅瀷)은 아들 성균관 학유 윤침(允忱)이 있다.

최세광(崔世光)은 아들 제(濟) · 발(潑) · 징(澄) · 섭(涉)이 있고, 딸들은 이위(李渭), 소린(蘇潾), 이언경(李彦慶)에게 시집갔다.

최세홍(崔世弘)은 아들로 연(淵)과 참봉 호(濩)가 있고, 딸들은 가문의 보배인 청풍 부수 응(應)과 우정신 김귀일(金貴一)에게 시집갔다.

허령(許鈴)은 장남 증 판서 욱(昱), 차남 성(晟)이 있다.

최세웅(崔世雄)은 아들 업(澲)과 도(渡)가 있다.

최세룡(崔世龍)은 아들 참봉 급(汲)이 있고, 딸들은 윤기신(尹起莘), 허계(許系), 현령 유영(柳泳)에게 시집갔다.

권유경(權有慶)은 아들 휘(徽)와 미(微)가 있으며, 딸들은 첨지 유필의(兪必毅), 현감 이증(李拯)에게 시집갔다.

민의(閔禕)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광세(匡世)이고, 딸들은 주부 유당(柳樘), 도정 이조(李調), 장령 홍인건(洪仁健)에게 시집갔다. 유당(柳樘)은 아들로 감역 몽사(夢獅), 부정 몽표(夢彪), 생원 몽웅(夢熊)을 두었고, 딸은 도승지 홍천민(洪天民)에게 시집갔다.

나윤침(羅允忱)은 아들 보덕 급(級)을 두었다.

 

여러 성씨의 후손들로 당시 존재한 분이 50여 인이나 되었다. 표(表) 안에 자손이 많이 퍼져, 수를 채울만한 분들을 대부분 기록할 수 없었다. 모두 조정에서 벼슬을 한 분들만 취하여 언급하였다.

참찬 홍담(洪曇)의 손자 헌(憲)은 승지이고, 증손 진도(振道)는 정사공신 남양군(南陽君)이며, 진문(振文)은 정사공신 행 호군이며, 외증손 심동구(沈東龜)는 사간이다.

판서 오억령(吳億齡)의 아들 익(翊)은 승지, 정(靖)은 참의, 전(竱)은 교리이다.

신종원(辛宗遠)의 아들 계영(啓榮)은 참판이다.

유호(兪灝)의 아들 대기(大祺)는 동지, 대정(大禎)은 참판, 손자 석증(昔曾)은 관찰사, 진증(晉曾)은 승지이며, 수증(守曾)은 장령이다.

홍인건(洪仁健)의 아들 준(遵)은 승지이다.

한옹(韓顒)의 아들 진윤(震胤)은 헌납이다.

나윤침(羅允忱)의 손자 만갑(萬甲)은 참의이다.

최숭한(崔崇漢)의 증손자 충원(忠元)은 헌납이다.

외증손 판서 허휘(許徽)의 아들 계(啓)는 참판이고, 권복생(權福生)의 외현손 임연(林堜)은 승지, 임담(林墰)은 관찰사이다.

홍서봉(洪瑞鳳)의 어머니는 실은 권(權)참판의 외증손이다.

서봉(瑞鳳)은 변변치 않은 재주를 가지고 관직에 나아가 포의에서 관직의 으뜸에까지 올랐고, 아들 명일(命一)은 지손이면서 관직이 홍문관 응교를 지냈으니, 어찌 선조의 음덕을 입지 않음이 없겠는가? 평상시에 외할머니를 추모하며 논하는 말, 그대로 공의 중후한 덕과 겸손한 모양새를 소급해보면, 모두 하늘이 보살펴 주어 복을 받은 모습이다. 후손들이 이와 같이 성대한 것은 그 후덕함이 쌓여 크게 드러난 것이니, 그 모든 것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공의 손자 전한공(典翰公)이 당시 문장을 잘하는 사람에게 묘비명을 요청하여 지었으나 비석을 세우기 전에 임진년 병화로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조정에서의 사적과 관작에 제수된 순서를 알 수 없게 되었으니, 통탄하지 아니하겠는가? 명(銘)에,

 

아아! 시중(侍中)께서 고려의 근원을 개척하여,

고려조 오백 년이 다하도록 혜택이 넘쳐흘렀네.

아름답도다! 공숙(恭肅)공은 나래 펼쳐 거듭 날아올라,

태평성대에 이름나고 충훈부에 공도 남겼도다.

밝은 하늘 보답 많아서 대대로 유명한 자손 낳아

구름 같은 벼슬 행렬 고관뿐이로다.

어떤 이는 나라의 그릇이요, 어떤 이는 나라의 기둥인데

각각 선훈을 지키어 가문의 명예를 잘 계승하였도다.

오직 공의 혜택은 강물처럼 흘러 퍼지니

여러 갈래 흩어져도 막힘없이 흐르도다.

아침에 가득해도 저녁에 잦아드는 근원 없는 물처럼

일어나자 쓰러지는 것이 세상 흘러가는 풍조라.

원대하도다! 이 큰 복, 예부터 뉘라서 더 높을까.

돌에 새겨 길이 후손이 잊지 않도록 하노라.

 

6대손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익위사 우익찬(行 翊衛司 右翊贊) 종운(從耘) 글을 쓰다.

 

오! 슬프다. 선조의 의관을 이 산에 묻은 지 근 300년이라. 조상의 공업을 방책 삼아 후손들이 나라에 두루 쓰이면서, 조상의 아름다움을 새긴 비석은 오히려 없구나! 60년 전에 여러 현손들이 세운 비석의 글을 다시 쓰고자 하였으나, 비석은 마멸되고 손상된 채 묻혔던 것이라, 후손들이 애써 뜻을 헤아려 읽으려 해도 읽을 수 없었다. 이에 종손 명우(明宇)의 집에 남아 있는 인쇄한 글을 상경(尙絅)이 모아 새로이 무덤길 옆에 세웠다. 때가 숭정 60년 후 48 을묘년(영조 11, 1735년) 9월 일이다.

8대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동지경연 성균관사(兵曹判書兼知春秋館事同知經筵成均館事) 상경(尙絅)이 삼가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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