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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문혜공(영규) 1세

수성최씨 시조(문혜공) 최영규(崔永奎) 신도비문>

by "율문" 2016. 11. 16.


<최영규(崔永奎) 신도비문>


隋城伯文惠公

隋城伯文惠公神道碑銘幷序(수성백 문혜공 신도비명 병서)


오호라! 이곳 수원의 삼봉 병좌원은 고려 수성백 최공의 묘소이다. 묘 앞의 한조각 돌은 아직도 후인들로 하여금 가리키면서 말하게 하기에는 족하지만 유적에 있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비록 그 자손이 인근에 많이 있어 숭봉은 매우 근실하게 하고 있지만 역시 문헌의 징신이 없으니, 수백년 후 그렇게 민몰하게 됨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지금 공의 후손이 내외 족적의 계보에 실린 바를 널리 상고하고 기록하여 한 묶음을 만들어 나에게 보이는데 이것만으로도 아쉬운 대로 영세토록 전하기를 꾀할 수는 있겠다.

공의 휘는 영규이니 고려 원종 2년 문과에 올라 보문각 대경이 되고 서경을 유수하였는데, 교도에 방략이 있어 유화가 성하게 일어났다. 충렬왕 때 수주 지방의 민속이 완악하여 윤상을 전연 모름으로 임금이 몹시 걱정하니 공은 자신의 위망이 중함을 자인하고 개연히 문교를 펴고 비속을 고쳐보려는 뜻을 세워 자청하여 호장이 되어 그 주민을 교도하였다. 이에 일체를 충과 효로 가르치기에 힘쓰니 일년도 채 못 되어 이륜이 잘 펴지고 완악한 풍속이 크게 바뀌었다. 임금이 크게 포장을 가하고 28년 임인년 그 공덕이 최외하다 하여 최로 성을 내리고 백으로 작위를 봉하였으며 품계는 숭록에, 벼슬은 전서로 올렸다.

그 후 호남 안무사가 되어 나갔는데 임지에서 돌아가니 문혜라는 시호가 내렸고 수주 백성들은 공의 덕의를 사모하여 각자 물력을 모아 묘지를 마련하여 장례를 모셨으며 매년 절일에는 읍리가 백성을 인솔하고 제사를 올리니 당시 시랑 윤보가 애사를 지어 극진히 찬양하였으며 심지어 원종은 이윤과 주공에 비유하였다. 또 사신은 명현 등의 말로 실록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품성의 탁이함과 덕행의 순실함, 문장과 사업이 당세에 빛났던 바는 가전으로 전해오는 말이 있기는 하나 애석하게도 희미한 것을 분명하게 할 도리가 없다.

공의 본 계는 김씨로 신라왕 부의 17세손이다. 고조는 한림직학사 민성이요, 증조는 한림학사 병부상서 효인이며, 조는 좌정승 충순공 현경이다. 아버지는 찬성사 전이요, 비 왕씨는 판삼사 좌사 창의 따님이다. 배위 이천서씨는 시중랑 문한의 딸로 이남을 두었는데, 맏이 흡은 정당문학 찬성사요, 다음 필은 밀직학사인데, 후사가 없었다. 흡의 2남은 중시랑 평장사 원개와 종부령 문개이고, 원개의 아들은 판전교 소윤 청송감무책이며, 문개의 두 아들은 한성소윤 선과 호조참판 의이다. 책의 아들은 사정 경이요, 선의 두 아들은 군수 세온과 부사 중온이며 의의 두 아들은 군사 수산과 사직 말산인데 세온부터 비로소 아조에서 벼슬하였다. 경의 장남 유림은 무과에 급제하고 병조참판을 지냈는데, 세조조에 적개공으로 수성군에 봉하여지고, 시호는 안양공으로 공에게는 오대손이 되며, 가장 높이 현달하였다. 공부터 지금까지는 거의 십수세가 되어, 후예가 매우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안양공의 적장손 도건이 매년 세일제를 지내고 또 앞으로 묘도에 비를 세우려고 하니 성의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정작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한 것은 공의 16대손 종술과 응태이다. 아! 지금은 성명의 세대를 당하여 수성을 화성으로 고치고 그곳 사민이 교택을 가장 많이 입고 있으니 공의 자손으로 옛날 미처 못했던 일을 거행하려고 한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변화에 더욱 어떻게 흥감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공의 유당이 여기에 있고 또 이런 때를 만난 것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옛날 고려조에 훌륭하게도 공은 덕이 높았는데,

엄연히 수주로 내려와 훈적을 독실하게 하여,

이륜을 널리 펴고 어리석은 풍속을 크게 바꾸어,

위망이 더욱 높아지니 성을 내리고 작을 봉했다네.

이름은 후대에 전해져 훌륭한 유적 상상하게 하는데,

지난 일 망망하여 구름과 물과 함께 희구나.

그곳 주민으로는 의당 유택을 첨망하게 되는데,

높다랗게 큰 비 세웠으니 영세토록 마륵이 없으리로다.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세자이사 덕은 송환기는 글을 짓고,

기계 유한지는 전액을 하였으며,

통정대부 행 인철도호부사 창원 황운조는 글을 쓰고,

15대손 성집은 교검을 하다.


숭정기원후 경신년(정조 24, 1800년) 2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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