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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역대 인물

by "율문" 2012. 7. 11.

 

수성최씨 역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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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 최씨(隋城崔氏)는 영규계(永奎系)와 거경계(居涇系)의 두 계통이 있는데, 영규계의 시조(始祖) 최영규(崔永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의 후손으로 본래 성이 김씨(金氏)였다. 1261년(원종2) 문과에 급제하고 남조 전서(南曹典書)에 있으면서 보문각 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고 문학으로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하고 이륜( 倫)을 지키지 않아 사람의 행동이 금수(禽獸)와 다름없음을 왕이 개탄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戶長)으로 부사(副使) 안 설(安 說)과 함께 나가서 효제(孝悌)로 백성을 다스리고 의리(義理)로 설득하여 일년이 못되어 윤강(倫綱)이 부흥하자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충렬왕28) 포상하고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한 후 최씨(崔氏)로 사성(賜姓)하여 이 때부터 문호(門戶)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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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규의 아들 흡(洽)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원개(元凱)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의 후대에서 안양공파(安襄公派), 가산공파(嘉山公派) 등 다섯 파로 갈라졌다.
원개(元凱)의 손자 경(涇)은 조선이 개국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은 1450년(세종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어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都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유림(有臨)의 아들 윤신(潤身)은 사마(司馬)로 있을 때 공로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윤신의 손자 희효(希孝)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지방 판관(判官)을 거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봉암공(鳳巖公) 원개(元凱)의 증손(曾孫) 유용(有容)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역임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조선 때 감역(監役)을 지낸 윤종(潤宗)의 아들 언호(彦浩)는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고 정현(廷顯)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都水軍節制事)가 되어 당대에 뛰어났다. 그 외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보한(輔漢)이 있고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역임한 충원(忠元)과 부윤을 지낸 정원(貞元)이 있으며, 욱(煜)은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고성 군수(固城郡守)와 청송(靑松), 밀양(密陽), 부사(府使)를 지냈다.
형록(亨錄)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울에 침공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종부령(宗簿令) 문개(文凱)의 후손에서는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효건(孝騫)이 대표적이다. 효건은 1608년(선조 41)에 상고(尙古)의 아들로 태어나 1644년(인조2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아부를 하지 않아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시와 문장에 능하여 저서를 많이 남겼으며 [하산집(何山集)]이 유명하다. 거경계(居涇系)의 후손 희량(希亮)은 참봉(參奉)을 지낸 영(瀛)의 손자로 1594년(선조27)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노량 싸움에서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4년(선조37)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774년(영조5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창국(昌國)은 1750년(영조2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거쳐 능참봉(陵參奉)을 역임했으며, 규한(逵翰)은 1780년(정조4) 등제한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지내 수성 최씨 가문을 빛냈다.  

 

수성최씨의 시조인 최영규(崔永奎)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13세손으로 고려 원종조 문과에 급제해 남조전서(南曹典書)에 재직하면서 보문각대경(寶文閣大卿)을 겸직하였고, 서경(西京 : 평양)의 학도들을 가르쳐 그 명망이 높았습니다. 충렬왕조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한 것을 왕이 개탄하자, 최영규가 이를 바로잡았고, 왕은 그를 수성백(隋城伯)에 봉하고, 최씨 성을 하사함으로 지금의 수성최씨가 생겨났습니다.

 

수성최씨 인물로는..

 

최흡(崔洽) : 시조 영규의 아들로 고려 충렬왕조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전서(工曹典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름.
최원개(崔元凱) : 흡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조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은퇴 후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냄.
최유림(崔有臨) :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세조조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정충적개공신 3등에 훈호되고 가선대부 수성군에 봉해지는 동시에 오위장이 되었습니다. 사망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안양(安襄)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최사기(崔賜起) : 조선 단종, 세조조의 무신으로 삼군진무(三軍鎭撫)와 웅천현감 겸 웅천병마절제사(熊川縣監 兼 熊川兵馬節制使)를 역임함.
최경(崔涇) : 원개의 손자로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됨.
최정현(崔廷顯) :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都水軍節制事)에 이름.
최형록(崔亨錄)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됨
최희량(崔希亮) : 무과에 급제해 정유재란에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의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전사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수성 최씨(隋城崔氏)는 영규계(永奎系)와 거경계(居涇系)의 두 계통이 있는데...]
이러한 문구가 여러 사이트에 우리 수성최씨를 소개하는 글로 게재되어 있는데,
이는 호남문중에서 최초 족보 간행시 거경 등을 조상으로 잘못 알고 등재 배포함으로써 온갖 곳에서 이를 연구도 없이 인용 게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아래를 크릭하여 참조하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http://jkch.namoweb.net/ja/ect/pro-f.htm
호남문중 자손으로 문중사 연구에 힘써 많은 자료를 수집히여 정리하였으며 특히 호남문중 족보상 상계는 수원최씨 족보 상계를 필사한 것으로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여 호남문중에서도 잘못되었음을 알고 현재 시로 발간한 족보상 상계는 《거경 이상의 상계기록을 삭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