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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조선무신 최유림장군

by "율문" 2013. 9. 22.

 

 

 

최유림(崔有臨.1426.세종 8∼1471.성종 2)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수성(隨城). 자는 자앙(子昻), 시호는 안양(安襄).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 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사직(司直)으로서 세조 즉위에 공이 있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64년 중추원부사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전라도처치사로 나갔으나 앞서 명나라에 갔을 때 사무역(私貿易)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고신(告身)을 박탈당하고 외방으로 부처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되어 충청도병 1,000명을 이끌고 석장현(石場峴)싸움에서 적장 김말손(金末孫)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오위장에 임명되는 동시에 수성군(隋城君)에 봉하여졌다. 그 해 겨울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조선 전기 무신. 본관은 수성이고 자는 자앙(子昻)이다. 1450년(세종 32) 무과에 급제하여 고성현령 · 의금부진무 등을 역임하였고, 1455년(세조 1) 사직(司直)으로서 세조 즉위의 공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64년(세조 10) 중추원부사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전라도처치사로 나갔으나 앞서 명나라에 갔을 때 사무역(私貿易)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고신(告身)을 박탈당하고 지방으로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공현위장(控弦衛將)이 되어 충청도병 1,000명을 이끌고 석장현(石場峴)싸움에서 적장 김말손(金末孫)을 사로잡는 등 공을 세워 적개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오위장에 임명되는 한편 수성군에 봉해졌다. 그해 겨울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병을 얻어 고향인 평택시 독곡동으로 낙향하여 죽었다. 이에 성종이 슬퍼하며 안양(安襄)이라 시호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를 증직하는 한편, 진위군 우동(牛洞)에 치장(治葬)하도록 하며 신도비와 사당을 세워 후손이 받들도록 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이에 수성최씨 안양공파의 맥이 이때부터 이곳에서 이어져가게 되었다.

【수성군 묘 및 사당(隋城君墓ㆍ祠堂)】

평택시 향토유적 제4호. 소재지 평택시 독곡동 산53. 조선 세조 때에 무관이었던 최유림(崔有臨 : 1426∼1471)을 모신 사당과 그의 묘이다.

수성군 사당은 본래 진위현 탄현면 오좌동(현 평택시 독곡동 262)에 위치하고 있었고, 본관 5평 6홉, 외삼문 2평 5홉이었는데, 긴 세월에 10여회의 중수를 하였으나 더 이상의 수리 · 보수가 곤란하였다. 이에 1979년 문중에서 다시 신축하기로 하여, 1980년 4월 철거하고 구 사당 주위의 종중산(宗中山) 182평을 대지로 조성하였으며, 1982년 본관 11평 1홉, 외삼문 5평, 담장 110m의 규모로 신축하기 시작, 이듬해 6월 준공되었다. 한편 사당 옆에 세워진 신도비는 본래의 것은 마멸되어 없어져, 1972년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