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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반 상 식

생원. 진사

by "율문" 2016. 5. 27.

생원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나이 많은 선비에 대한 존칭어로 성씨에 붙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본래 중국에서는 국립대학격인 국자감(國子監)에서 공부하는 학생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러다가 송나라 이후 현시(縣試)·부시(府試)·원시(院試) 등의 시험에 합격, 주·부·현학(州府縣學)에 들어간 생도를 생원이라 하여 감생(監生)과 구별해 사용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 예종 4년(1109) 국자감에 칠재(七齋)를 설치하고 칠재생을 뽑는 승보시(陞補試)가 설치되면서 생원이 배출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승보시는 1147년(의종 1)에 제도화되어 1369년(공민왕 18)까지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1369년 이후 승보시는 생원시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는데 ≪고려사≫ 선거지에 ‘승보시즉생원시(陞補試卽生員試)’라고 기록한 데서 확인할 수가 있다.

조선시대는 과거제의 하나로서 소과인 생원시를 설치하고 그 합격자를 생원이라 하였다. 이 제도는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고종 31)까지 계속되었다. 이들은 진사(進士)와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다시 문과(文科)에 응시, 합격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당시 유생들이 밟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고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제수되는 경우도 있었다.

생원은 진사와 더불어 3년마다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增廣試)의 소과(小科)에서 각각 100인을 뽑는 것이 정식이었다.

조선시대는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식년시가 162회, 증광시가 67회 총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다. 조선 후기 특히 고종연간에는 한번에 100명 이상의 생원을 뽑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배출된 생원수는 2만 40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 중 문과에 진출한 수는 불과 3,000명을 밑돌아 하급 관리로 진출한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대부분 생원이라는 신분으로 각 지방 유지가 되어 가문을 이끌어갔다. 이들은 군역(軍役)이나 잡역(雜役)을 면제받았을 뿐 아니라 향촌 사회에서 존경을 받으며 지도자로 군림하였다.

생원과 진사와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는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다. 그것은 조선 초기 진사시가 없이 생원시만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며 실제 진사시가 생긴 뒤에도 성균관에서 좌차(座次 : 좌석의 차례)가 생원 말석에 진사가 앉은 것으로도 입증된다.

그러나 후기에 내려오면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생원의 사회적 존경도는 진사보다 하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는 유생들이 생원보다는 진사를 원했으며 ≪매천야록 梅泉野錄≫에 따르면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도 진사라고 말하는 사례까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진  사

귀족이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조선 건국 직후 즉위 교서를 통해 태조는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혁파하였다(1392). 그러나 하루아침에 진사시를 없애기는 어려워 태조 2년에도 감시(監試: 進士試)를 실시하여 99명을 선발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는 복구되었으나, 경학 위주의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6년 만인 세종 26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그 뒤 1453년(단종 원년)에 복구되어, 과거제도가 철폐되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조선 초기 약 60년간 진사시는 실시되지 못한 셈이다.

진사와 생원(生員)과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에는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는 진사시가 없이 생원시만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며, 실제 진사시가 생긴 초기에는 성균관에서 좌차(座次: 좌석의 차례)가 생원 말석에 진사가 앉은 것으로도 입증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유학자들은 사장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장 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시험인 생원시가 중시되는 경향이었다.

진사시는 생원시와 마찬가지로 향시(鄕試)와 복시(覆試)로 구분되는데, 향시는 각 지방에서, 복시는 예조(禮曹)에서 실시되었다. 향시에 합격한 사람은 복시인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100명의 진사가 선발되었다. 진사시의 초시에는 중앙의 한성시와 지방의 향시가 있었는데, 한성시에서 200명, 향시에서 500명이 선발되었고, 예조가 실시하는 복시에서 100명이 합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가 162회, 수시로 실시된 증광시(增廣試)가 67회로 모두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 진사시는 210회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배출 인원은 23,776명이었고, 현재 방목(榜目)이 남아있는 진사는 20,974(생원은 19,675)명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는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가는 것이 당시 유생들이 밟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과 급제에 실패하는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무직의 사류(士類)로 남아있는 진사들도 있었다. 생원과 진사를 합해 약 6.4%만이 문과에 합격하고, 93.6%가량은 백패(白牌)만 가진 채 살았던 것이다. 스스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은 진사들도 마찬가지로 백패만 가진 채 무직의 사류였다. 이는 학교시험을 단계적으로 거쳐 최종적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지 않고, 학교제와 과거제가 일원화되지 않고 별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진사시를 본 사람들이 많았던 것에 비하여, 조선 후기 이후에는 진사의 자격만을 따기 위해 진사시를 본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하여 진사시를 합격한 사람 가운데 일부만이 대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음관(蔭官)으로 관직을 받는 경우도 극히 소수였으며, 받는다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10∼20년씩을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었다. 관직이라 해도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해당되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가문의 배경이 약한 경우는 무직의 진사로만 남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변천]

사림파(士林派)가 등장한 이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는 대체적으로 생원보다 높아졌다. 19세기 이후 생원과 진사를 비교해보면 생원보다 진사가 훨씬 많았다. 한말 황현(黃玹)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대개 늙은 유생들을 생원이라 불렀으므로, 이와 구분하기 위해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오히려 진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의 유생들은 생원보다는 진사가 되기를 원했고, 진사를 보다 격이 높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생원시와 진사시는 그 실시 횟수와 뽑는 인원도 늘어나, 진사시에 100명이 훨씬 넘게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진사시의 합격자는 서울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생원시의 합격자는 지방 출신이 많은 것도 특징이었다. 생원·진사가 아니어도 문과에 직접 응시할 수 있었는데도 진사시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응시한 까닭은 진사는 유학자로서의 자격을 국가로부터 확인받은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진사는 즉각 관리가 되지는 못한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사족으로서의 일정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진사는 무직의 사류였지만 면역의 특전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참봉이나 교도 등의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고, 지방사회에서 여러 가지 기구를 조직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교와 서원 유생의 명부[儒案, 靑衿錄]를 장악하고 향촌을 이끌어 가는 일에 앞장섰다. 따라서 진사는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는 의미를 넘어 지방사회에서 유자로서 행세할 수 있는 자격증으로 활용되었다. 진사의 자격으로 지방민의 교화에 나서고, 백성에 대한 통제를 거들었으며, 그 밖에도 조세 수납, 군역 책성, 수리시설의 관리와 이용, 수령 등의 진퇴 등의 일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때로는 지방의 유력자로 지방관과 결탁하여 이권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해도 진사가 되고자 하였으며, 조선 후기로 올수록 진사는 더욱 양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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