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만천역
일반적으로 공천인 조례()·나장·일수·조군(漕軍)·수군·봉군(烽軍)·역보(驛保)를 말한다. 한편으로 천역을 공·사천으로 나누어 승려(僧侶)·영인(令人)·재인(才人)·무녀·사당(捨堂:사당패)·거사(擧史)·백정·혜장(鞋匠)은 팔반사천(八般私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공천인 기생(妓生)·나인·이족·역졸(驛卒)·뇌령(牢令)·관비(官婢)·유죄도망자(有罪逃亡者)를 칠반공천(七般公賤)이라고 했다.
이들 칠반천역은 대부분 신분상으로는 양인이나 그 역이 천한 조선 초기의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에서 비롯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에 국가체제의 재편을 꾀하면서 국역담당자의 확보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국역은 양인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각종 역의 부담이 일정하지 않아 고역일수록 피역·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처음부터 이들 역에는 양천불명자나 양인과 천인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 등 일반 양인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차정하게 되었다.
또 국역부담자가 감소함에 따라 성종대 수군세습제 시행을 필두로 역리 등과 같이 국가유지에 필수적인 기구에 대해서는 강제로 역을 세습시키고, 법제적·사회적으로 일반 양인에 비해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을 강요했다. 이때문에 이들은 더욱 천시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중에서도 고된 역들이 칠반천역으로 고정되고 통념화되었다.→ 신량역천
신량역천
고려시대 이래 봉수간·염간·진척·화척·양수척 등 칭간칭척자를 말한다. 조선 초기 양인과 천인이 나누어지면서 고려말 압량과 투속으로 인해 억울하게 천인이 된 사람, 노비문서가 없어 양인·천인을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 노비인 남자와 양인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등 실제로는 천인구실을 하고 있으나 양인확보책에 따라 신분을 양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생겼다.
따라서 편법적인 조치로 이들을 신량역천인이라 했다. 그러나 결국 양인이었지만 사람들이 꺼리는 일을 했기 때문에 양인과 천인의 중간계층일 수밖에 없었다. 1415년(태종 15) 보충군을 설립하고 이들에게 일정기간 동안 근무하면 양인이 될 수 있도록 법제를 만들었다. 이들 이외에 군현제도의 개정으로 향·소·부곡민 등이 양인으로 신분상승했으나 여전히 천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신량역천인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보충군
뒤에 보충대(補充隊)로 이름이 바뀌었다.
보충군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엽의 기록에도 보이나, 고려말의 보충군은 말 그대로 2군6위(二軍六衛)의 부족한 군사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 도의 한량자제(閑良子弟) 가운데 선발한 군인으로 조선시대 보충군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선시대 보충군은 1415년(태종 15)에 신분은 양인이나 국가에 지는 역(役)은 천인과 마찬가지였던 칭간칭척자(稱干稱尺者), 각 품 관원의 천인 출신의 첩 소생으로 양인이 되고자 하는 자를 모아 정원을 정군(正軍) 3,000명, 그 봉족(奉足) 6,000명으로 하여 설치되었다.
당초 칭간칭척자와 관원의 천인 출신의 첩 소생은 고려말 또는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사재감(司宰監) 또는 사수감(司水監)의 수군(水軍)으로 소속시켜 양인임을 인정하되 일정한 제약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소속되지 않은 칭간칭척자 등의 수가 매우 많아 국가의 각종 역을 부담하는 계층이었던 양인을 늘리려는 취지에서, 국가 재정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던 염간(鹽干)을 제외하고 이들을 모두 보충군에 소속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보충군은 군사적 기능보다는 신분관계에 무게가 실려 있는 존재였다.
이들은 대개 중앙의 여러 관청에 소속되어 주로 사령군(使令軍)으로서 복무했으며, 복무 연한이 지나면 그 자신은 물론 자매와 딸·손자, 연한이 지난 뒤 태어난 자식 등이 양인 신분을 획득하여 후손들까지 양인이 되는 한편, 7품 이하의 서반 하급관직으로 진출하는 길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같은 혜택에도 불구하고 보충군 대상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방 거주자들은 복무 기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또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서 보충군의 군안(軍案)에 이름이 오르는 것을 꺼렸으며, 이름이 오른 뒤에도 복무를 꺼려 서울로 가지 않거나 복무하다가 도망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에 국가는 숨어 있는 보충군 편성 대상자의 색출을 강화하고, 복무를 기피하거나 도망하면 벌금을 물리거나 노비 신분으로 영속시키는 처벌을 가하기도 했다. 또한 서울에서 먼 제주도나 평안도·함경도 국경지역의 보충군은 1418년(세종 즉위) 이후 점차 서울로의 번상을 면제하는 대신 국경지역인 현지에서 국방에 종사하고, 평안도·황해도·함경도 보충군의 일부는 거주지 인근의 역참(驛站)에 소속되어 그 관군(館軍) 또는 관부(館夫)로 복무하게 되었다.
이로써 보충군 가운데 일부는 본래의 군역과는 다른 내용의 역을 지기도 했으나, 이들도 복무 연한을 채우고 나면 양인 신분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는 서울에 번상하는 보충군과 같았다.
한편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본래의 칭간칭척자 계층이 소멸하여 사실상 보충군에 소속되는 대상이 양반을 아버지로 하고, 공사천(公私賤)을 어머니로 하는 천처첩자손(賤妻妾子孫)만으로 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보충군은 자식의 신분이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결정되는 종모법(從母法)의 법제 아래서, 당연히 천인이 되어야 할 계층을 그 아버지가 양반인 경우 그 지위를 고려하여 양인이 될 기회를 주는 장치로 정착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 위에 1450년(문종 즉위)에는 보충군으로 10년의 군무를 마쳐야 양인이 될 수 있도록 한 규정을 완화하여 1,000일 복무 후 양인이 되도록 개정했으며, 나아가 보충군이라는 명칭도 1469년(예종 1)에 보충대로 고쳤다. 이로써 〈경국대전〉 규정에서는 보충대에 소속되는 대상이 양반을 아버지로 하고 공사천을 어머니로 하는 천처첩자손만으로 한정되었다.
보충대는 여전히 보충군이라고도 불렸으며, 5위(五衛)의 편제 안에 의흥위(義興衛)에 소속되었다. 보충대는 정액이 없었으며, 4교대로 4개월씩 복무하여 대체로 1,000일의 군무(軍務)를 마쳐야 종9품의 잡직을 받고 양인 신분을 획득했다. 같은 보충대라도 그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인 경우 330일, 원종공신(原從功臣)은 500일만 근무하면 양인이 되도록 해서 차등을 두었다. 복무 연한이 줄었음에도 보충대 복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16세기 초반에는 보충대가 맡던 사령의 역을 번상하는 보정병(步正兵)으로 대신 충당하게 하여 정병 군역의 폐단을 가중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후 보충대를 규정대로 복무시키자는 논의도 없지 않았으나, 이미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 다음이어서 그 실행이 불가능했다. 조선 후기에는 곡식이나 돈을 바치고 천인 신분을 면제받은 자들을 모두 보충대에 소속시키기도 했으나 유명무실하기는 전과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