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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조상님의 관직

by "율문" 2018. 4. 14.

수성(隋城)

수성(隋城)은 수원(水原)의 고호(古號)이며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시대에 매홀군(買忽郡),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다. 1271년(원종 12)에 수원 도호부(水原都護府)로 고쳤으며, 1310년(충선왕 2) 수원부로 되었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군(郡)으로 환원되었다가 1413년(태종 13)에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고쳤고,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한 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의 2등 군이 되었다. 1931년 수원면(水原面)이 수원읍(水原邑)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원시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을 화성군으로 개칭하였다. 수성 최씨(隋城崔氏)는 영규계(永奎系)와 거경계(居涇系)의 두 계통이 있는데, 영규계의 시조(始祖) 최영규(崔永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의 후손으로 본래 성이 김씨(金氏)였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하고 남조 전서(南曹典書)에 있으면서 보문각 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고 문학으로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하고 이륜( 倫)을 지키지 않아 사람의 행동이 금수(禽獸)와 다름없음을 왕이 개탄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戶長)으로 부사(副使) 안 설(安 說)과 함께 나가서 효제(孝悌)로 백성을 다스리고 의리(義理)로 설득하여 일년이 못되어 윤강(倫綱)이 부흥하자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 (충렬왕 28) 포상하고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한 후 최씨(崔氏)로 사성(賜姓)하여 이 때부터 문호(門戶)를 열었다. 한편 거경계(居涇系)는 고려 때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지낸 거경(居涇)을 중시조(中始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영규의 아들 흡(洽)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원개(元凱)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의 후대에서 안양공파(安襄公派), 가산공파(嘉山公派) 등 다섯 파로 갈라졌다.
원개(元凱)의 손자 경(涇)은 조선이 개국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은 1450년(세종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어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都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유림(有臨)의 아들 윤신(潤身)은 사마(司馬)로 있을 때 공로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윤신의 손자 희효(希孝)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지방 판관(判官)을 거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봉암공(鳳巖公) 원개(元凱)의 증손(曾孫) 유용(有容)은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역임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조선 때 감역(監役)을 지낸 윤종(潤宗)의 아들 언호(彦浩)는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고 정현(廷顯)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 겸 세자익찬(世子翊贊)을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제사(全羅左都水軍節制事)가 되어 당대에 뛰어났다. 그 외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보한(輔漢)이 있고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판관을 역임한 충원(忠元)과 부윤을 지낸 정원(貞元)이 있으며, 욱(煜)은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고성 군수(固城郡守)와 청송(靑松), 밀양(密陽), 부사(府使)를 지냈다. 형록(亨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서울에 침공한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종부령(宗簿令) 문개(文凱)의 후손에서는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효건(孝騫)이 대표적이다. 효건은 1608년(선조 41)에 상고(尙古)의 아들로 태어나 1644년(인조 2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으나 성품이 강직하고 아부를 하지 않아 벼슬은 부사에 그쳤다. 시와 문장에 능하여 저서를 많이 남겼으며 [하산집(何山集)]이 유명하다. 거경계(居涇系)의 후손 희량(希亮)은 참봉(參奉)을 지낸 영(瀛)의 손자로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여러번 공을 세웠으나 이순신이 노량 싸움에서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고 1774년(영조 50)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창국(昌國)은 1750년(영조 2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거쳐 능참봉(陵參奉)을 역임했으며, 규한(逵翰)은 1780년(정조 4) 등제한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지내 수성 최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성 최씨(隋城崔氏)는 남한에 총 10,619가구,4,00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隋城崔氏 族譜刊行事
敬順王의 11世孫 始祖 영규공
西紀 1662年(顯宗3年壬寅譜)
西紀 1722年(景宗二年壬寅譜)
西紀 1736年(丙辰譜)
西紀 1760年(庚辰譜英祖36年속간보)
西紀 1760年(庚辰譜)
西紀 1962年(壬午譜顯宗三年)
西紀 1849年(己酉譜憲종拾五年)
西紀 1856年(丙辰譜)
西紀 1892년(壬辰譜)
西紀 1980年(庚辰譜)
西紀 1907年(丁未譜)
西紀 1909年(隆熙三年己酉譜)
西紀 1928年(戊辰譜)
西紀 1930년(庚午譜大同譜25卷16冊)
西紀 1957年(丁酉譜)
西紀 1977年(丁巳譜大同譜)
西紀 1996年(丙子譜)
西紀 1997年(丁丑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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