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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반 상 식

증직제도

by "율문" 2018. 11. 20.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죽은 뒤에 품계 ·

관직을 추증(追贈)하여 영예를 누리게 한 일.              


삼국시대부터 행하여졌으나,

제도화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988년(성종 7) 문무상참관() 이상의 부조()를 봉작한

이른바 추은봉증()을 실시하면서부터이다.


1391년(공양왕 3) 도평의사사(使)의 상언()으로


2품 이상은 [3대()],


3품은 [2대],


4∼6품은 [부모]까지를

증직하는 제도를 확립시켰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추증의 대상과 범위를 확대시켰다.


즉, 고려시대의 추은봉증 이외에도 명유() ·절신(),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

효행이 뛰어난 사람 등에게도 상당한 품계와 관직을 추증하였고,

이밖에도 증직한 경우가 많았다.

 

 

정의

조선시대에 공을 세우거나 현달한 관인과 효자 등이 죽은 뒤에 보다 높은 관직이나 관계 등을 내리던 제도.
개설
증직(贈職) 업무는 이조(吏曹) 고훈사(考勳司)에서 담당하였다. 대상은 실직(實職) 2품 이상 문무관의 3대, 공신의 부모와 처, 아들 다섯을 등과(登科)시킨 부모, 효자, 충신, 절부, 종친 제군(諸君), 왕비의 3대, 유현(儒賢) 등이었다. 증직은 관작을 사후에 내리는 제도였으므로 분황제(焚黃祭)를 지내고 위패에 ‘증모관작(贈某官爵)’이라 썼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증직은 공덕을 쌓은 자손들의 부모나 공훈을 세우고서 죽은 자에게 그 공을 기리고자 포상하는 제도의 하나이다. 988년(고려 성종 7)에 봉증제(封贈制)가 제정된 이래, 증직은 꾸준히 시행되어 왔다. 특히 조선에서는 고사(古事)의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계승하였는데, 이 제도는 『경국대전』에 ‘추증’ 항목으로 법제화되었다. 그 후 공훈의 범주가 확대되어 그에 따른 법제화가 이루어지기도 하고, 납속제(納粟制)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많은 폐해를 낳기도 하였다.
내용
증직은 종친 및 문·무관으로서 실직 2품 이상인 자의 3대를 추증(追贈)하는 법이 기본이었다. 3대에게 증직하는 법식은 부모에게는 자기 품계를 기준으로 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차례로 한 등씩 낮추었다. 사망한 처에게도 남편의 직품(職品)을 좇아 증직하였다. 종친은 대군(大君)의 처부(妻父)에게는 정1품을, 왕자군(王子君)의 처부에게는 종1품을 증직하였다. 친공신은 직이 낮더라도 정2품을 내렸다.
아들 다섯이 등과(登科)한 경우에는 부모에게 해마다 쌀을 내리다가 죽으면 증직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이외에도 증직 대상은 전사자, 효자, 충신, 종친 제군, 왕비의 3대, 절부, 유현 등을 들 수 있다. 사후의 인물들이 그 대상이며, 조상이 증직 대상일 경우에는 본종(本宗) 외의 외친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변천
증직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이루어졌지만, 법제는 1396년(태조 5)에 제정되었다. 이때에는 6품 이상으로서 3대의 제사를 받들어야 할 사람의 3대 고비(考妣) 즉,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증직하도록 하였다. 부친은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와 증조부는 각각 한 등씩 낮추며 모친도 같게 하였다. 공신은 2등을 추가하였다. 이 법은 현직 관원인 6품 이상이 대상이었으며, 증직의 범위는 3대 조상인 증조부모까지였다. 그 취지는 조종(祖宗)의 현양(顯揚)이었다.
개국공신에게는 그 부모와 처에게 증직의 특전을 주었다. 1등에게는 3등, 2등에게는 2등, 3등에게는 1등을 뛰어 올려 봉증(封贈)하도록 하였다[『태조실록』 1년 9월 16일]. 이는 1398년(태조 7)의 정사공신에게도 똑같이 시행하였으며, 이 제도는 당분간 유지되었다.
6품 이상 관직자에 대한 증직은 그 후 정2품 이상으로 강화되었다. 『두씨통전(杜氏通典)』에서 “대신이 죽으면 증직을 내리거나 치제할 때에, 모두 조신(朝臣)을 보내어 의물(儀物)을 갖추어 행한다.”고 한 고사를 근거로 하여, 대신으로서 증직할 자에게는 치제까지 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3년 8월 24일]. 따라서 6품 이상에서 정2품 대신 이상으로 강화된 것은 그 이전으로 보인다. 담당 관서는 『경제육전(經濟六典)』과 당제(唐制)에 의거하여 고공사(考功司)로 변경하였다[『세종실록』 6년 9월 17일].
이러한 증직은 공로자에 대한 포상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어 그 범위는 얼마든지 확대될 개연성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의 이념 실현과 정치적 목적 혹은 전쟁이나 위급한 사건의 발생 등으로 포상제의 시행이 필요할 때, 증직은 법제화되지 않았더라도 왕의 특교에 의해 시행될 수 있었다. 모든 증직은 승전(承傳)과 전교(傳敎)로 시행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증직의 대상은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 왕비 등 왕실 족친의 3대, 효자, 충신, 절부 등으로 확대되었다.
왕실 족친의 3대에게 증직하는 법은 『속대전』에 규정되었다. 왕과 대원군, 왕비와 왕세자빈, 대군, 왕자군의 지위에 따라 차등적으로 증직하였다. 1755년(영조 31)에는 선조의 후궁인 증(贈) 숙의(淑儀) 이씨를 경빈(慶嬪)으로 증직하였으며[『영조실록』 31년 6월 14일], 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 그리고 대빈의 외친에게도 각각 우찬성좌찬성을 증직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실은 외친에게까지 증직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증직은 충신·효자·절부에 대한 포상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 포상은 정문(旌門)·상직(賞職)·증직·복호(復戶)·면역(免役)·상물(賞物) 순으로 등급을 나누었다[『인조실록』 17년 6월 12일]. 여기서 정문은 모범이 되는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붉은 문을 세우던 것을 말하며, 상직은 상으로 관직을 내려주던 것, 복호는 국가가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徭役) 부담을 감면하거나 면제해주던 것을 말한다. 그 이전에는 없었던 증직이 이때에 와서 포상에 포함되었다.
1621년(광해군 13)에는 진위사중국에 갔다가 배의 침몰로 빠져 죽은 박이서 등에게 증직하였다. 이후 『속대전』에 왕명을 받들어 출정하여 국외에서 사망한 자에게는 품계를 승급하여 증직한다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증직하는 법은 고하를 막론하고 특지(特旨)로 2계급 이상을 올려주는 것이 아니라면, 한 자급만을 올려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당하관 이하의 경우 품계를 높이거나 낮출 때 품급에 구애받지 않는 관행이 나타났다. 그리고 유생에게 증직하는 경우에는 참하관(參下官)만을 증직하고, 그 중에 가장 드러난 자만을 6품직으로 증직하며, 그 중에 특히 탁월한 자는 품지한 뒤 대시(臺侍)를 증직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13년 9월 1일].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에는 조정 관리 가운데 나이 70세 이상은 모두 삼망(三望)을 갖추어 비답을 내린 후에 3대를 추존할 것을 허락하고, 선비와 서민 가운데 나이 80세 이상은 모두 단망(單望)으로 중추부 동지에 붙일 것을 허락하였다. 대체로 단망에 붙이는 자는 자신에게만 첩지를 주고 추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관리 임명의 규례였다. 그러나 승정원에서는 이런 규례를 알지 못하고 단망에 붙이라는 교지 끝에다 3대까지 추증한다고 곧바로 써넣어, 하는 수 없이 모조리 동지(同知)로 그의 선대까지 추증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사족과 상인(常人)은 구별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어, 사족 가운데 현직(顯職)에 추증하기에 합당한 자에게만 증설한 동지의 자리에 삼망을 갖추어 낙점을 받은 후 즉시 추증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4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 납속제의 시행과 신분의 혼효(混淆) 현상이 가중되는 가운데, 중인 이하의 신분으로서 고위 관품을 받는 사례가 많이 증가하였다. 증직으로 그동안 내리는 직임은 신분에 따라 구별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관(醫官)역관(譯官) 등에게도 정경(正卿)·아경(亞卿)·경조(京兆)의 벼슬을 증직하는 현상이 나타나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의관으로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된 자의 부(父)에게 판윤(判尹), 조부에게 우윤(右尹)을 증직한 것을 환수하여 고쳐 제수하도록 하였다. 중인으로서 2품 이상인 자에게 육조·경조·금오(金吾)·총관(摠管)의 직임을 허락하지 말라는 의도였으나, 오래지 않아 그 폐단이 전과 같았다고 한다[『숙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이는 『속대전』에 이르러 의과(醫科)·역과(譯科) 출신자, 중인(中人) 및 서자손(庶子孫)으로서 증직되는 자는 참판·총관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증직을 청원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는 반드시 대신이 경연에서 품지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규례였다. 정부에서는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된 납속제의 하나로 증직 첩문을 발급하기도 하였다. 군현(郡縣)에 곡식을 바칠 백성을 모집하여 영직(影職)·노직(老職)·증직 및 각종 첩문을 주었다. 국가의 토목 영건이나 전후 복구, 또는 중외의 심한 기근으로 인해 국가 재정을 보충해야 할 때 이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1671년(현종 12)에는 노직(老職)으로 가선(嘉善)·통정(通政), 증직으로 지사(知事)·우윤·판결사(判決事)·통례(通禮)·좌랑(佐郞), 영직(影職)으로 판관(判官)·주부(主簿)와 허통교생(許通校生)·면강(免講)·보충대(補充隊) 등까지의 첩문(帖文)을 각 도에 만들어 보내 곡식을 모으게 하였다[『현종실록』 12년 2월 6일].
명종 연간부터 시행된 이 제도가 갈수록 남용되자, 갖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이름이 없는데도 외람되게 증직된 것으로 하거나, 교지(敎旨) 중에는 가자(加資)된 것만 기재되어 있는데 실직을 함부로 써넣고, 돈령이 아닌데도 곧바로 돈령이라고 써 넣으며, 원종(原從)에 참여되었을 뿐인데도 곧장 공신이라고 써넣는 등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현종실록』 4년 11월 1일].
증직이 내리면, 해당자의 자손은 분황제를 거행하였다. 이는 증직 사실을 고유(告由)하고 누런 종이에 베껴 쓴 증직교지를 불에 태우는 의식이다. 그러고는 위판에 쓰는 직역을 ‘증모(贈某)’로 고쳐 썼다. 광해군 때에는 종묘의 배향 공신 위판에도 그동안 본직을 쓰다가 선조(宣祖) 부묘를 앞두고 이황의 위판에 대해 좌찬성이 아닌 증직된 ‘영의정’이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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