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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조의 대가(代加) 제도에 대하여 -통덕랑 등-

by "율문" 2018. 11. 20.

조선조 대가(代加)제도   - 통덕랑 등에 대하여

 

장달수

 

우리나라의 족보를 보면 관직에 나가지 않았는데 통덕랑(通德郎) 통사랑 (通仕郞)

장사랑 (將仕郞) 등등이 보이고 부인에게도 공인. 의인 유인 등으로 올라있어서

이에 대한 대강을 정리해 보았다.

 

조선시대의 代加制度는 양반사회가 그 신분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한 제도였다. 代加는 나라에서 관원에게 내려준 別加(특별 加資)를 자신이 받지 못하고 대신 子․壻․弟․姪등 친족에게 주는 제도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관에게 별가를 내렸고, 크고 작은 일이 있을때에도 이에 참여한 관원들에게 별가를 내렸는데, 별가를 받은 관원으로서 資窮(정3품당하)에 이른 堂下官과 堂上官은 별가 받은 散階를 자신에게 더하지 못하고 가까운 친족에게 대신 주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자주 백관에게 별가가 내려졌으므로 종6품 정도의 낮은 관직에 있는 관원이라도 쉽게 資窮에 이르러 친족에게 代加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직에 나아간 자가 있는 양반가문의 친족들은 대가를 받아 散階를 받은 사람이 많이 있었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특전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제도는 세종 31년(1449)에 시작되어 18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시대 代加관련 古文書는 관직에 나아간 자가 있는 양반가문의 古文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고문서를 통하여 代加를 받아 文․武散階를 갖게 된 사람들의 형태를 구분해 보면 여섯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代加로 받은 문․무산계를 가지고 문과에 급제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특전을 누리면서 유리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고, 친족들에게 代加를 할 수 있었다.

 

대가(代加): 품계를 올려 줄 사람을 대신하여 그의 동생, 자제(사위 조카 포함), 등에게 품계를 올려 주는 경우를 말한다.

 

대가자(代加者): 품계가 승진될 자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대신으로 그의 子 婿 弟 또는 姪 등으로 하여금 품계를 받게 한다. 즉 대신 품계를 받는 자를 대가자(代加者)라 한다.

 

산계(散階): 직사(職事)는 없고 품계만 있는 벼슬. 산관(散官) 산직(散職) 산반(散班) 이라고도 함.

 

 

經國大典 吏典 除授 條

 

○ 대가자(代加者)는 정오품 통덕랑으로써 한도로 한다. (장사랑(將士郞) 이상은 14등의 품계를 순차로 代加하되 품계의 등계(等階)을 초급하지 못하고 정오품 통덕랑에서 그친다)

 

14등 품계: 정5품 통덕랑에서 종9품 장사랑까지가 14품계이다.

 

정5품(正五品) 통덕랑(通德郎) 통선랑(通善郎)

종5품(從五品) 봉직랑(奉直郎) 봉훈랑(奉訓郎)

정6품(正六品) 승의랑(承議郎) 승훈랑(承訓郎)

종6품(從六品) 선교랑(宣敎郎) 선무랑(宣務郎)

정7품(正七品) 무공랑 (務功郞)

종7품(從七品) 계공랑 (啓功郞)

정8품(正八品) 통사랑 (通仕郞)

종8품(從八品) 승사랑 (承仕郞)

정9품(正九品) 종사랑 (從仕郞)

종9품(從九品) 장사랑 (將仕郞)

 

귀암 이원정의 경우 처부 완석정의 대가를 받았다.

 

이언영 1568(선조 1)∼1639(인조 17)

이원정 1622(광해군 14)∼1680(숙종 6).

 

○1642년(인조 20) 임오 선생 21세

○4월 종사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부호군(1625) 별가 2회 분 대가

○4월 통사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부호군 별가 2회 분 대가

○5월 무공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사과 별가 2회 분 대가

○5월 선교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별가 대가

 

○1651년(효종 2) 신묘 선생 30세

○10월 승의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대가

○10월 봉직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대가

○12월 통덕랑이 제수되다. 처부 완정 대가

 

*망제(亡弟) 통덕랑(通德郞) 의령 현감(宜寧縣監) 묘지(墓誌) 갈암 찬

 

군은 형이 셋이고 아우가 셋이다. 장형은 상일(尙逸)이니, 진사(進士)로 능서랑이 되었으며, 김 부인(金夫人) 소생이다. 둘째는 휘일(徽逸)이니,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기전 재관(慶基殿齋官)이 되었다. 다음은 현일이니, 조정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재(太宰)에 이르렀다. 다섯째는 정일(靖逸)이고, 여섯째는 융일(隆逸)이니 모두 통덕랑(通德郞)이다. 일곱째는 운일(雲逸)이니 일찍 졸하였다. 이상은 모두 경당 선생의 외손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 오위도총부부총관(行平安道兵馬節度使兼安州牧使五衛都摠府副摠管) 허공(許公)의 신도비명 병서(幷序)

 

장남은 서(曙)인데 통덕랑(通德郞)이고 둘째는 성(晟)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되었고 막내는 면(冕)인데 통덕랑이다.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박공(朴公) 묘갈명

 

장남 안흠(安欽)은 성균관 생원이고, 둘째 안복(安復)은 예조 좌랑이고, 셋째 안시(安蓍)는 통덕랑(通德郞)이고, 넷째 안학(安學)은 선교랑(宣敎郞)이고, 막내 안명(安明)은 장사랑(將仕郞)이다.

 

부호군(副護軍) 송공(宋公) 국강(國綱) 묘표

 

아들 규정(奎精)은 통덕랑(通德郞)인데 박씨 소생이고, 규영(奎英)은 통사랑(通仕郞)이고 규회(奎會)ㆍ규보(奎報)는 둘 다 승사랑(承仕郞)이다.

 

 

상변통고

○ 한강이 말하기를, “국법에는 비록 통정대부라도 실직을 지낸 적이 없다면 그의 처에게 봉호를 허용하지 않는다. 일찍이 서울의 어떤 조관(朝官)을 본 적이 있는데, 당상관에 오른 지 10년 뒤에 처가 죽음에 신주에 감히 숙부인이라 쓰지 못하다가, 그 뒤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어 비로소 부인이라 고쳐 썼다. 이를 들은 자들이 이것이 예라고 일렀다”고 했다. ○ 남계가 말하기를, “부인은 남편의 실직을 따른다는 설은 옛날에도 의심했던 것이니, 아마 한결같이 《비요》대로 따르기에는 어려울 듯하다”고 했다. ○ 명재가 말하기를, “옛날의 비지(碑誌) 문자에 보이는 칭호를 살펴보면 품계를 따르고 실직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실직이 있는 사람은 품계가 비록 실직보다 높더라도 실제 품계이다. 실직이 없는 사람은 수직(壽職), 납속(納粟), 군공(軍功), 대가(代加)와 같은 것이 모두 공허한 품계이다. 실제 품계라면 그에 의거하여 ‘모봉(某封)’이라 쓰지만 공허한 품계라면 쓸 수 없다. 남편에게 관직이 없을 때의 부인의 칭호는 ‘제주(題主)’ 장에 보인다.

 

 

음사(蔭仕)

 

○ 우리나라에는 사람을 선발하는 길이 셋이 있으니, 문과ㆍ무과ㆍ음직이다. 음직은 보거(保擧)로서 뽑히거나 공천받아 선발된 연후에 비로소 주의(注擬)를 허락했으니, 대개 2백 년 동안이나 이를 변경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급(資級)이 아홉 개의 품계가 있는데, 낭관으로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자급이 올라가는 자는 반드시 달 수를 계산하여 달이 차야만 비로소 옮겼는데, 이를 사가(仕加)라 일컬었고, 나라에서 은상이 있어 백관에게 널리 반포하여 미치는 것을 별가(別加)라 일컬었으며, 부형의 벼슬이 높아서 친히 은전을 받지 않고, 그 아들이나 아우가 대신 받는 것을 대가(代加)라 일컬었는데, 별가와 대가는 상전(常典)이 아니다. 만기를 기다려 옮기는 자는 반드시 수년을 지나야 겨우 한 계급을 올라가므로, 승평(昇平)한 때에 벼슬 사는 사람은 문벌이 좋거나 또는 공로가 있지 않으면 계제를 밟지 않고 갑자기 뛰어 오를 수 없으므로, 벼슬한 지 10년이 지나도 오히려 통훈의 품계도 얻지 못하였다. 임진년 이후에 국가가 병화를 입어 파천하게 되니, 적을 토벌하는 데 이르러 조그마한 공적에도 모두 벼슬과 상을 주었다. 이로부터 문무의 두 벼슬길이 함께 흐려졌는데, 광해조에 이르러서는 은상(恩賞)을 노린 것이 말할 수 없었다. 상촌휘언(象村彙言)

○ 유순정(柳順汀)의 손자 사필(師弼)은 나이 6세에 훈신의 후손으로 예에 따라 부사용(副司勇)을 주었다. 《수곡집(壽谷集)》

 

세조 7년 신사(1461,천순 5) 2월6일 (정축)

 

이조에 회맹 공신 및 그의 친척들에게 자급을 더할 것을 전지하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회맹 공신(會盟功臣) 및 적장자(嫡長子)·친자(親子) 등에게는 각기 한 자급(資級)을 더하고 자궁(資窮)한 자는 아들·사위·아우·조카·손자 중에서 1인을 대가(代加)하게 하라.”

하였다.

 

인조 3권, 1년(1623 ) 9월 21일(무신)

이조가 폐조 때 문란하게 대가(代加)한 관품을 삭제할 것을 청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자궁(資窮)하면 대가(代加)하는 법령은 조목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관직이 없는 사람은 받아야 할 가자(加資)가 있더라도 대부(大夫) 이상급의 벼슬은 절대로 함부로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폐조 때에는 이것이 지극히 문란하여 아들이나 사위, 또는 아우나 조카로서 불법으로 거듭 받은 자가 매우 많아서 관직을 겨우 한번 임명받았는데도 자급은 이미 찼는가 하면, 심지어 유생·한량이 다 통훈(通訓)·어모(禦侮)에 오르고 문무과 출신 가운데 자궁자(資窮者)가 으레 당상(堂上)으로 승급되는 자가 많았습니다. 자급이 문란해지고 사로(仕路)가 혼탁해진 것이 모두 이에서 연유된 것으로 오늘날의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무신년 이후 관직이 없이 받은 대가(代加)는 모두 통덕(通德)으로 제한하고 조봉(朝奉) 이상은 모두 삭제해 버리소서. 그리고 이 뒤로는 대가법을 이에 준하여 법식을 만들되 조목을 엄하게 세워 신명시켜 알리소서.”

하니, 따랐다

 

승정원일기 인조 23년 7월 16일 (을축)

 

○ 傳曰, 左賓客南以雄, 都承旨金光煜, 左承旨金尙, 同副承旨李曼, 各兒馬一匹賜給, 輔德徐祥履等及翊衛李時中以下, 各加一資, 資窮者代加

 

 

숙종 6년 2월 21일 (신사)

 

崇善君의 아들 1인에게 代加하고 金萬重 등에게 孰馬 1匹을 사급하라는 비망기

 

영조 44년 무자(1768,건륭 33)

 

3월11일 (기해)

 

좌의정 한익모가 순서를 밟지 않고 품계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 아뢰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한익모가 ‘통덕랑(通德郞)은 실로 높은 품계인데 더러 순서를 밟지 않고 뛰어 오르는 폐단이 있어, 김종수(金鍾秀)는 유독 그 품계를 나오지 않고 군수로 있다가 낭관이 되었다.’면서 앞으로는 신칙하여 대신 품계를 올려 준[代加] 자는 순서를 밟지 않고 뛰어 오르는 폐단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정조 1년 정유(1777,건륭 42)

 

5월5일 (기사)

 

시독관 심염조의 건의에 따라 낭계가 차서를 거치지 않고 통덕랑에 오르는 것을 금하게 하다

 

 

소대(召對)하였다. 시독관 심염조(沈念祖)가 아뢰기를,

“관계(官階)를 갑자기 외람스럽게 올리는 것이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대개 낭계(郞階)가 차서(次序)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통덕랑(通德郞)으로 오르는 것 때문에 문(文)·음(蔭)·무(武)를 물론하고 사적(仕籍)에 오른 지 1, 2년이면 모두 통훈 대부(通訓大夫)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실직(實職)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외람스럽기는 한가지입니다. 조정에서 종핵(綜核)하는 방도에 있어 난잡스러운 것을 그대로 방임할 수는 없습니다. 전조(銓曹)에 분부(分付)하여 곧바로 통덕랑으로 올리는 폐단을 통렬히 금하게 하고 기타 차례를 따르지 않고 갑자기 올라간 것은 또한 이정(釐正)하게 하는 것이 의당하겠습니다.”

하니, 전조에 계칙하여 시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백사집

 

변란 초기에 사목을 정할 때에는, 당상(堂上) 이상 및 삼품 준직(三品準職)이 된 이후에 또 참급(斬級)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계급을 헤아려서 승진시킬 수 없고 또한 버려 두고 쓰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 평상시에 대가(代加)하는 예에 의거하여 사목을 상정(詳定)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그 규정을 개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준직 자궁(準職資窮)이 되었더라도 대가를 하지 않고 부정(副正) 이하의 관원에게 계급을 헤아려서 승천(陞遷)시키는 예에 의거하여 그 여공(餘功)을 기록해서 후일 승진의 바탕으로 삼고, 심지어는 5급을 기준하여 일일이 당상에 승진시키기까지 하면서 또 자궁 대가(資窮代加)한다는 글도 빼 버리지 않아서 앞뒤의 말이 서로 다르게 되는 의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상변통고

○ 한강이 말하기를, “국법에는 비록 통정대부라도 실직을 지낸 적이 없다면 그의 처에게 봉호를 허용하지 않는다. 일찍이 서울의 어떤 조관(朝官)을 본 적이 있는데, 당상관에 오른 지 10년 뒤에 처가 죽음에 신주에 감히 숙부인이라 쓰지 못하다가, 그 뒤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어 비로소 부인이라 고쳐 썼다. 이를 들은 자들이 이것이 예라고 일렀다”고 했다. ○ 남계가 말하기를, “부인은 남편의 실직을 따른다는 설은 옛날에도 의심했던 것이니, 아마 한결같이 《비요》대로 따르기에는 어려울 듯하다”고 했다. ○ 명재가 말하기를, “옛날의 비지(碑誌) 문자에 보이는 칭호를 살펴보면 품계를 따르고 실직을 따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 실직이 있는 사람은 품계가 비록 실직보다 높더라도 실제 품계이다. 실직이 없는 사람은 수직(壽職), 납속(納粟), 군공(軍功), 대가(代加)와 같은 것이 모두 공허한 품계이다. 실제 품계라면 그에 의거하여 ‘모봉(某封)’이라 쓰지만 공허한 품계라면 쓸 수 없다. 남편에게 관직이 없을 때의 부인의 칭호는 ‘제주(題主)’ 장에 보인다.

 

망제(亡弟) 통덕랑(通德郞) 의령 현감(宜寧縣監) 묘지(墓誌) 갈암 찬

군은 형이 셋이고 아우가 셋이다. 장형은 상일(尙逸)이니, 진사(進士)로 능서랑이 되었으며, 김 부인(金夫人) 소생이다. 둘째는 휘일(徽逸)이니,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기전 재관(慶基殿齋官)이 되었다. 다음은 현일이니, 조정에 벼슬하여 관직이 태재(太宰)에 이르렀다. 다섯째는 정일(靖逸)이고, 여섯째는 융일(隆逸)이니 모두 통덕랑(通德郞)이다. 일곱째는 운일(雲逸)이니 일찍 졸하였다. 이상은 모두 경당 선생의 외손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행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 오위도총부부총관(行平安道兵馬節度使兼安州牧使五衛都摠府副摠管) 허공(許公)의 신도비명 병서(幷序)

장남은 서(曙)인데 통덕랑(通德郞)이고 둘째는 성(晟)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되었고 막내는 면(冕)인데 통덕랑이다.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박공(朴公) 묘갈명

장남 안흠(安欽)은 성균관 생원이고, 둘째 안복(安復)은 예조 좌랑이고, 셋째 안시(安蓍)는 통덕랑(通德郞)이고, 넷째 안학(安學)은 선교랑(宣敎郞)이고, 막내 안명(安明)은 장사랑(將仕郞)이다.

 

 

부호군(副護軍) 송공(宋公) 국강(國綱) 묘표

아들 규정(奎精)은 통덕랑(通德郞)인데 박씨 소생이고, 규영(奎英)은 통사랑(通仕郞)이고 규회(奎會)ㆍ규보(奎報)는 둘 다 승사랑(承仕郞)이다.

 

숙종 39년 계사(1713,강희 52)

10월16일 (경인)

 

 

좌의정 김창집이 관계(官階)가 대부인 자의 감시 응시 자격에 대해 논하다

 

한 달 전에 민진후(閔鎭厚)가 진달한 바로 인하여 유학(幼學)·음관(蔭官)으로서 관계(官階)가 대부(大夫)인 자는 참상(參上)·참하(參下)를 물론하고 감시(監試)에 응시하지 말게 하는 여부를 예조(禮曹)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의논하기를,

“근래에 음관(蔭官)으로 이미 감찰(監察)·수령(守令)을 지낸 자 이외에는 모두 감시(監試)에 응시하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는데, 이제 하순(下詢)하심을 받들어 비로소 국전(國典)을 상고하였더니, 이르기를, ‘생진과(生進科)는 통덕랑(通德郞) 이하의 응시를 허락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통덕랑의 품계로 한정하여 대부(大夫)는 응시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주(註)에 또 이르기를, ‘수령(守令)은 생진시(生進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이는 비록 통덕랑의 품계에 있더라도 수령인 자는 응시할 수 없음을 말하니, 어찌 이미 대부(大夫)와 수령이 되었으면 모두 현관(顯官)이기 때문에 아울러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찰(監察)에 이르러서는 비록 논한 바가 없지만, 그들이 현관이 된 것이 수령과 같으니, 응시를 허락하지 않은 것도 혹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통덕랑의 품계에 있으면 비록 참상(參上)에 있더라도 구애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대부(大夫)에 승진된 자는 본디 논할 것이 없고, 이미 수령을 지냈으면 비록 대부에 승진되지 않았더라도 응시할 수 없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오로지 수령만 제한이 있는 줄 알고 계급(階級)에 제한이 있는 줄을 몰라 잘못된 예를 인순(因循)하여 문득 법전(法典)의 본 뜻과 서로 어긋나게 했으니, 바로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후에는 참상(參上)·참하(參下)를 물론하고 이미 대부가 되고 수령이 된 자는 응시를 허락하지 말고, 감찰은 마땅히 수령과 같게 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김우항(金宇杭)도 또한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하였으며, 다른 대신은 혹은 질병으로, 혹은 밖에 있어 헌의(獻議)하지 못하니, 김창집의 말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주]팔의(八議) : 죄를 감면받을 여덟 가지 대상. 곧

1.의친(議親:왕의 동고조(同高祖) 8촌·9촌 이내의 동성(同姓)인 친족과, 왕의 조모·모의 시마(緦麻) 이상인 친족과, 왕비의 소공(小功) 이상인 친족과, 세자비의 대공(大功) 이상인 친족)·

1. 의고(議故:왕실에 친분이 두터워 오랫동안 특별히 은덕(恩德)을 받아 온 사람)·

1. 의공(議功:적의 장수를 죽였거나 적의 군기를 빼앗았거나 적의 예봉(銳鋒)을 꺾었거나, 외국의 군중(軍衆)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거나 온 국민을 안녕하게 하였거나, 국경을 개척하여 그 공을 대상기(大常旗)에 기록한 사람)·

1. 의현(議賢:큰 덕행(德行)이 있는 군자로서 그 언행이 온 국민의 본받을 바가 되는 사람)·

1. 의능(議能:큰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서 군중을 잘 정제(整齊)하거나, 정사(政事)에 밝아서 임금을 보좌하고 인륜(人倫)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사람)·

1. 의근(議勤:관리로서 관직을 잘 수행하고 밤낮으로 봉공(奉公)하거나 사신으로 외방에 나아가 간난(艱難)을 겪고 크게 공로가 있는 사람)·

1.의귀 (議貴:관작(官爵)이 1품이거나, 실직(實職) 3품 이상이거나, 산계(散階) 2품 이상인 사람)·

1. 의빈(議賓:그 선대의 제사를 받드는 전대(前代)의 군왕의 자손이어서, 왕의 빈객(賓客)으로 대우받는 사람).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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