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룡(崔世龍)
隋城崔氏 첨악공(瞻嶽公) 행장(行狀)
❍시 대 : 조 선
❍출 생 : 1509年 己巳(중종4년)
❍사 망 : 1594년3월15일 甲午(선조27년)
❍경 력 : 대가[代加]교지(敎旨) 품계(品階)종4품 조봉대부(朝奉大夫)
❍직 업 : 학자(學者) 문인(文人)
❍성 별 : 男
❍자녀 : 一男 三女
❍본 관 : 수성(隋城)
본관은 수성(隋城)이시며 자(字)는 치운(致雲), 호(號)는 첨악(瞻嶽) 휘(諱)는 세룡(世龍)이시다.
조고(祖考)의 자(字)는 여회(汝晦), 호(號)는 방촌(芳村), 휘(諱)는 윤명(潤命)이시며“증”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이시다.
부친(父親)의 자(字)는 순수(舜壽)와 예향(禮鄕), 호(號)는 시은(市隱)과 항은(巷隱)이시며, 대가[代加]교지(敎旨) 품계(品階)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학자(學者) 문인(文人)이시고 휘(諱)는 숭한(崇漢)이시다.
부인은 덕수이씨(德水李氏)이시며 부(父)의 자(字)는 택지(擇之), 호(號)는 용재(容齋), 휘(諱)는 이행(李荇)으로 공조판서(工曺判書), 이조판서(吏曺判書), 좌찬성(左贊成),우의정(右議政),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좌의정(左議政)의 女이시다.
공(公)께서는 1509년(중종4년) 시은(市隱)선생의 사자(四子)중 막내아드님으로 태어나시어 천성(天性)이 평화로우시고 지조(志操)가 고상(高尙)하시와 문아(文雅)의 덕이 있으시므로 착한사람을 보시면 좋이 여기시며 날로 사귀시는 친분(親分)이 있고, 악한 사람을 보시면 미워하시되 규각(圭角)을 내지 않으시니, 사람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정북창(鄭北窓) 염(磏)이 세상에 처신(處身)하는데 무엇이 제 일착(一着)이 되는가를 물은 즉 공(公)이 대답하여 가로대 사람이 기미(機微)를 보는 사람도 있고, 이름을 내고자하는 사람도 있으며,이욕(利慾)을 따르는 자도 있으되 기미(機微)를 보는 자는 비단 기미를 보아서 물러날 뿐 아니라 기미를 보아 나아가기도 하지만, 기미라 하는 것은 나아가기가 쉬운 고로 나아가는 자가 많으며, 이욕(利慾)을 쫒는 자는 물러나서 이익이 되면 나아가게 되니 이것이 하계(下計)라, 물러나면 풍속을 해치고, 나아가면 나라를 해롭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할 줄 모르는 자는 도를 해롭게 함이 더욱 심하므로 이 세상에 제 일착의 사람이 없다 하노라 하시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율곡은 공의 처 재종질) 세상에 나아갈 때에 작별하시며 부탁하시기를 대저 말이라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로우면 경솔한 것을 보이기 쉽고, 너무 숨기면 의심을 받기 쉬운 것이요, 또 사람을 사귀는데 경솔히 끊으면 업신여김을 받기 쉽고, 경솔히 믿으면 속임을 당하기 쉬우며, 또 일을 처리하는데 너무 늦으면 다 심하다 하고, 너무 급하면 위태하기 쉬우며, 말을 하는데 기회가 있으니 사람을 만나야 하고, 사람을 사귀는데 기회가 있으니 일을 만나야 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기회가 있으니 때를 만나야 할 지니 세상이라 하는 데는 여러 사람이 다투는 마당이요 기회와 모략(謀略)이 모인 곳이라 위로 임금에게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동료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 몸을 보존치 못하면, 도(道)가 될 수 없다 하시니 율곡이 말하기를 선생은 어찌하여 세상에 나가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고 물으신데, 공(公)이 대답하시기를 내가 그대에게 부탁한 것을 진실로 실행이 된다면 가(可)하거니와 그러하지 못하면
나도 당세(當世)에 한 기괴(奇怪)한 사람이니 무엇이 이로우리요 하시고 다시 세상에 보이지 않으셨다.
공(公)은 처음에 돈녕(敦寧)참봉(參奉)에 임명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으시고 뒤에 천거로 제릉(齊陵)의 직랑(直郞)에 임명했으나 또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벼슬은 두 갈래가 있으니 정사와 가난을 위함이니 이것이 만약 정사를 위함이면 하나의 음관(蔭官:조상의 공으로 과거에 오르지 않고 벼슬함)일 뿐이며 만약 가난을 면키 위한다면 나는 이미 안빈(安貧)하고 있는 바이니 내 무엇을 더 구하리오”하셨다. 그 후 조정에서 대간[臺諫: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에 천망(薦望)이 되었으나 때에 공(公)은 이미 하세(下世)하신 후였다.
공(公)이 평소에 그 장인 되시는 용재(容齋) 이정승에게 간혹 문안을 가시되 오래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돌아오시니 그 이유는 이정승의 형님으로 당시 유명한 간신(奸臣)인 이기(李芑)를 꺼려 미워하심이니, 그 바른 것을 지키는 지조가 이러하셨다. 원래 임진왜란(壬辰倭亂)당시에 가족과 여러 일가를 거느리시고 춘천으로 오셔서 모애(慕崖)와 고란(古蘭 : 현지명 고탄)으로 다니시며 기미를 보고 대처하므로 한 사람도 잃은 자가 없이 지내므로 원근(遠近)에서 친지들이 많이 돌아와 의지하며 피란을 한 이가 많으니 공의 사형제분 자손이 가평 춘천 홍천등지에 살고 있는 호수가 사오백호를 넘으며, 삼사백년 동안에 대소 과경(科慶)에 삼십 여장이요 저명한 문사(文士)가 많이 나시다.
공(公)께서는 춘천(春川) 산천을 사랑하시와 서상면 궐산리(蕨山里)에 거택(居宅)을 장만하시고 여생(餘生)을 책으로 소일하시다가 1594년3월15일 甲午(선조27년) 향년86세 일기로 졸(卒)하시다.
공(公)께서는 一男 三女를 낳았는데 아들 통덕랑(通德郞) 급(汲)이고 딸들 장녀(長女)는 윤기신(尹起莘), 차녀(次女)는 허계(許系), 삼녀(三女)는 현령 유영(柳泳)에게 시집을 갔으며 손자(孫子)는 형제분을 두셨는데 장손(長孫) 길원(吉元)이고 차손(次孫)흥원(興元)이시다.
공(公)의 빙부(聘父) 휘(諱)이행(李荇), 호(號)용재(容齋)께서 공조판서(工曺判書), 이조판서(吏曺判書), 좌찬성(左贊成), 우의정(右議政)으로 재직하실 때 공(公)은 대가(代加) 종4품(從四品)조봉대부(朝奉大夫)교지(敎旨)를 받으셨으나 훈구파. 사림파의 당파싸움에 화를 면하시기 위하여 교지(敎旨)를 숨기시고 후대에 전하라 하시다.
❍묘소(墓所)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 산 42번지 원통산(元通山)에 건좌합봉(乾坐合封)으로 모시어 있다.
❍사당(祠堂)은 2013년10월20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 304-1번지에 건립하고 2015년 4월4일 공(公)의 후손 178위(位)를 합동(合同)으로 봉안(奉安), 음력10월05일에 세일사(歲一祀)를 봉행(奉行)하다.
2019年(己亥)
찬성공파(贊成公派) 첨악공(瞻嶽公) 행장(行狀) 저자(著者)
찬성공파(贊成公派) 후헌공(后軒公)종중 회 장 10세손(世孫) 호(號)는 율문(栗文) 관혁(寬爀)과
종 손 겸 총무이사 12세손(世孫) 호(號)는 우생(又生) 덕희(德喜) 공동(共同) 수정(修正) 편찬 [編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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