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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수성군파(유림)편

by "율문" 2019. 3. 23.

자(字)는 자앙(子昻), 세종 8년 병오(丙午:1426) 2월22일 출생(出生)하셨으며, 고(考) 휘(諱) 경(涇) 증(贈)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수성군(純忠輔祚功臣 資憲大夫 兵曹判書 隋城君) 시호(諡號) 안양공(安襄公)의 장자(長子)이시다.

 

세종 32년 경오(庚午:1450)에 무과에 급제하셨으며, 세조 1년 을해(乙亥:1455)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시고, 세조 10년 갑신(甲申:1464) 고성 현령(縣令)에서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로 당상관(堂上官)이 되셨으며,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명국(明國)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시고, 세조 11년 을유(乙酉:1465) 전라도 수군 처치사(水軍處置使)로 제수(除授)되셨다.

 

세조 13년 정해(丁亥:1467) 공현위장(空弦衛將)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충청도 병사 천명(千名)을 인솔하고 종군(從軍)하여 평정(平定)하는데 공을 세움으로서, 왕은 공신연(功臣宴)을 베풀며 이르기를, 정충적개공신 가선대부 수성군 겸 오위장(精忠敵愾功臣 嘉善大夫 隋城君 兼 五衛將) 최유림(崔有臨)에게 하교(下敎)하셨다. "몸을 잊고 순국(殉國)하였으니, 이미 불세(不世)의 공훈(功勳)을 세우면 덕(德)을 높여 공을 보답하는데, 마땅히 비상(非常)한 은전(恩典)을 거행해야 한다. 지난번에 적신(賊臣) 이시애가 흉악(凶惡)한 도당(徒黨)을 모아 반역(叛逆) 하였으나, 기어이 추악(醜惡)한 무리를 섬멸(殲滅)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경은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험난(險難)하고 위태(危殆)한 곳에 출입하고 시석(矢石)을 무릅쓰니, 원흉(元兇)의 머리를 바치고, 만백성(萬百姓)들의 생활이 평안해졌다. 이러한 큰 공을 생각하여 감히 포상(褒賞)하여 장려(奬勵)함을 잊겠는가?  이에 경을 책훈(策勳)하여....하니, 이르거든 수령(受領)할지어다.  아 아! 태산(泰山)과 황하(黃河)가 숫돌과 띠가 되도록 잊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단서(丹書)와 철권(鐵券)으로 길이 자손(子孫)에게 전하기를 기약(期約)하라."

 

같은 해에 명국(明國)의 요청으로 만주 지역을 어지럽히던 야인 이만주의 난(亂)을 평정함에 조선군(朝鮮軍) 토벌(討伐)대장으로 출병(出兵)하셔서 조선군의 위용(偉容)을 보이며 승리함으로서 명국에서는 사상하지(賜賞賀之)를 하였으며, 왕은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제수하셨다.

 

세조 14년 무자(戊子:1468)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로 부임하여 재임하시던 중 그간의 중직(重職)을 역임(歷任)하시면서 병을 얻으셔서 성종 2년 신묘(辛卯:1471) 8월 28일에 향년(享年) 46세로 졸(卒)하시니, 정충적개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수성군(精忠敵愾功臣 資憲大夫 兵曹判書 隋城君)에 추증(追贈)되시고, 시호(諡號)를 안양(安襄)으로 내리셨다.

 

배위(配位)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진산소씨(晉山蘇氏) 사직(司直) 흡(恰)의 여(女)이시며, 묘소(墓所)는 경기도 평택시 지산동(우곡) 산 106의1 오좌원(午坐原) 재 공조 상 오좌(在 公兆 上 午坐).

 

※ 평택시 향토유적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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