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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문혜공 행장 3세 봉암공행장 종부령 묘지명

by "율문" 2019. 6. 15.

시조 (始 祖) 최영규 ( 崔 永 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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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문혜공 (文 惠 公 )행장 (行 狀 )

삼가 최씨 의 구보 (舊 譜 ) 를 상고하여 보면, 말하기를 고려 말렵에 김공영규 (金公永奎)가 원종 2 년 신유에 문과에 올라 형조전서로 보문각 대경 (大卿)을 겸직하여 서경 (지금의 평양) 학도에게 문교(文敎)를 펴고 수주(水州) 백성들에게 효제를 가르쳤다. 이러하므로써 유교가 성하게 일어나고 이윤(彛倫)이 다시 퍼졌다. 충렬왕이 그 공덕이 높은것을 아름답게 여기어 최(崔)로 사성(賜姓)을 하고 수성백(隨城伯) 을 봉하여 수주로 공 의 채읍(菜邑 : 그 땅의 조세를 받아먹는 일) 으로 하였으니 수성최씨가 이로부터 시작 되었다. 뒤에 호남 안무사로 나갔다가 돌아가니 상 ( 上:충렬왕 고려 25대 왕 )이 문혜 (文惠)라고 시호를 주었고 수주의 백성이 공의 덕과 의를 사모하기를 부모같이 하여 각각 스스로 힘 을 내서 어량천 삼봉산 아래 병방(丙方)을 등진 언덕에 장례 모시고 매년 절일(節日)에 으뜸 아전이 삼반(三班 )을 인솔하여 제사를 지냈으니 만약 공덕이 세상을 덮고 류택 (流 澤 )이 사람에게 흡족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겠는가 ? 대개 공의 문장과 재덕으로 이미 조정에 병용 되어 시대를 상심하고 풍속을 근심하는 마음 을 시가 (詩歌)에 붙혀 그 시대의 인군을 깨우치고 세상의 교화를 도와 이미 무너진 이윤을 능히 붙들고 이미 병들은 인심을 회생시키니 오륜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다 함께 밝혀졌고 사단이 이것에 힘 입고 회복되어 바야흐로 흥기 (興起)하여 보고 감동하는 즈음에 오직 이 수주 한 지방이 이윤 (彛倫)이 상실되어 자못 금수지역 (禽獸之域)에 가까워 졌다. 공이 개연 (槪然)히 나가 다스리기를 청하여 부사 안열 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힘써 기강을 떨치어 일으키고 교화를 돈독히 하여 풍속을 바로 잡고 그 부지런한 마음과 몸을 다 바친것을 여기서 가히 볼것이다. 무릇 그 나라를 경륜한즉 밝은 듯이 명교 (名敎)가 흥기 (興起)하고 그 고을을 다스리면 화락 한 듯이 효제로 나가니 이것은 요순의 다스림으로 권면을 하고 도의의 방법으로 유도하야 그 인군의 덕 을 성취 시키고 그 나라를 보전하게 하여 아름다운 꾀와 위대한 공훈이 반반하게 방책에 실리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옛날 윤시랑(尹侍郞) 보 (普)의 애사 (哀詞)에 가로되 무릇 기둥과 기초가 꺽이니 이 백성이 그 비호 받을 바를 잃었고 태산 북두 가 무너지니 사류(士流)가 그 믿을바가 없어져서 갈 곳을 몰라 덕음 (德音)을사모하고 와서 곡을 하는 것은 대개 오도(吾道)를 위하여 곡한 것이요 사문 (斯文)을 위하여곡 한 것이며 사제의 의리를 위하여 곡 한 것입니다.

그 공명 (功名)과 진퇴하는 즈음을 본다면 무너진 윤상을 깨우치고 시들어진 풍절을 수립하여 국가의 큰 근심을 풀어주는 것이 맨손으로 하늘을 붙들고 한치의 돌로 새는 것을 막는것 과 어찌 다르 오리까 ? 이러므로 원종은 이윤과 주공 으로 대접 하였고 사신은 명현으로 기록을 하였으니 부자(夫子:공자 를 말함)가 이른바 사람이 존재하면 정치가 거행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하였다. 내가 일찍이 동국사와 유현전 을 읽었는데 공이 어린 군주를 보도 (補導)하고 백성 을 권계 (勸戒)한 글장에 이르러서는 그 썩지 않은 업적과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중 한 것 은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다. 아 ! 연대가 오래되어 공의 묘소가 거칠어 지고 비석이 뭉개져서 지금 그의 자손들이 협의 하고 탄성 하여 봉분을 고치고 잔디 를 입히며 비석을 중건하는데 공의 후손 전 명릉참봉 영호 (英浩)가 종유사 승화(昇和)와 더불어 성동우옥 (城東寓屋)으로 나를 찾아와 구보 (舊譜)에실린 행장을 나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즉 공의 실행인데 고인이 입언 한 것이다.그러나 여러번 각자를 했는데 소루되고 착오 된 것이 많으니 가히 옛날 것 그대로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그러니 대필을 빌어 묘소를 아름답게 꾸미기를 원 합니다. 하거늘 내가 그 말을 듣고 그 정성에 감동하여 글을 못한다고 가히 사양해서는 안 되겠기에 그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그 소루한 것을 보충 하는데 또한 감히 망령되게 한 마듸 의 말씀으로 찬양하야 참람하다는 꾸지람을 듣지 아니 하도록 다만 원장을 가지고 정리할 뿐이다.

                                                 가선대부 전향 신 군수 해평 윤영구 ( 尹영求)는 삼가 찬술 하노라.

 

      봉암 ( 鳳 巖 )선생 행장 (行 狀)

공의 휘는 사위인데 원개로 고쳤다. 고려 충렬왕 삼십년 (서기1304년)갑진 에 태어나서 공민왕 이년 ( 서기 1353 년)계사에 문과에 올라 행직 (行職)으로 사헌부 집 의겸판 삼사좌사 요, 조휘 (祖諱)는 영규요, 원종 이년 신유에 문과 에 올라 숭록대부 남부전서로 공이 있어 충렬왕 28년 ( 서기 1302년)임인에 수성백 (隨 城 伯)으로 봉 하고 최씨 성을 내리고 시호를 문혜 (文惠)라 하였다. 조비 (祖妃)는 이천서씨 시중랑 (侍中郞)문한 의 딸이라 이남을 생산 했다.고휘(考諱)는 흡 (洽)이니 충렬왕 이년 병자에 문과 에 올라 충숙 충례 두 조정에 행직으로 정당문학 문하찬성사요 비(妃)는 여흥민 씨 규(珪)의 딸인데 이남을 낳았다. 때에 신우 (辛禑)가 나라의 권세를 도적질하여서 공이 시중랑 김사안(金士晏) (사안은 즉 본성 사종 (四從)이다)과 더불어 사직하고 물러나 장단 봉암동으로 돌아가서 복자당(伏雌堂)삼간 을 건축하고 문인 하륜,권중화.등 일백육십여 인과 더불어 날마다 시문과 경학으로 일 삼다가 우와 창왕 부자가 죽임을 당한 뒤에 하륜 등이 와서 말하기를 [ 선생이 조정에 나오시면 음류가 물러나고 양류가 등용되어 종묘사직의 대계 (大計)뿐만 아니라 도리어 또한 우리들의 행복이니 원컨대 선생 은 생각 하소서 ]하니 공이 실심하여 탄식하기를[ 우리 경순왕 이 태조에게 귀부(歸附) 한 뒤 거의 오백년 에 이르도록 공훈이 왕실에 있었고 영화와 식록이 가장 성했는데 어찌 사직 (社稷)을 잊으랴.다만 반정한 모든 신하들이 번갈아 가며 서로 다투며 자랑하고 권세가 임금의 위엄을 옮겨 날마다 국사 가잘못되어 가고 또한 강물이 불게 끓고 목마가 말씀을 이해하니 어찌 경계하고 삼가지 않는가] 하니 묻기 를 [ 어떤 것으로 불게 끓는다 합니까 ? ]사람은 일족이 붉은 피로 물들 기미가 있고 시대는 용이 변할 징조가 있다 하면서 시를 지어 보이시고 다시는 시사를 말하지 않으니 하륜 등이 도리어 부끄러워 하고 두려워 하는 빛이 있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으며 자태가 훤칠하며 성품은 너그럽고 후하며 여러 서적을 널리 보아서 조금도 막힘이 없으며 후학 을 권면하여 유도를 흥기 시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사방에 학자들이 더욱 앙모 (仰募) 하였다. 평생에 급한 빛이 없고 모서리를 들어내지 않고 대의 에 통하고 사리에 밝으며 가산을 늘리는 것은 돌아보지 아니 해서 비록 여러 번 식량이 없었으나 생각에 두지 않고 무릇 출입할 적에 항상 서적을 가졌으며 관직에 있을 적에는 둥글고 모난 것이 법도에 맞게 했으며 가정에서는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한 행실 을 행 하였다 그때 세속이 오로지 불교의 법을 숭상하니 유교가 막힌 것을 깊이 염려하여 선비와 서민들로 하여금 주문공 의 가례를 따르게 하고 집에 사당을 세우고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니 세상에서는 염락 에 있던 주돈이 (周敦이)와 낙양에 있던 정호. 정이, 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 하였다.이보다 앞서 공이 중서 시랑겸 동평장사로서 십 팔조 공민왕에게 세 번이나 올리니 왕이 노하여 청풍군사로 좌천 시켰다. 향리 로 돌아와서는 가산을 돌보지 않고 날마다 문인 과 더불어 성학을 강론하며 혹은 강호(江湖)의 가에 산보하며 세상밖에 방랑 하였다.조정에 들어가서는 나라를 다스리고 구제 하였고 초야에 물러가서는 학문을 강습하며 참되게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기량으로 삼고 벼슬과 녹을 헌신처럼 버리고 부모를 기쁜 마음 으로 봉양하며 바다모퉁이에 궁하게 살면서도 즐거워하여 근심을 잊으니 고산 이존오 께서 대인군자 라고 칭찬 한 것이 이것이다. 문인 이첨, 김초 가 훼불한 상소는 모두 공이 지은 바 다. 만년에는 윤리사 삼편과 훼불문 이편을 지은것이 세상에 전한다. 목은 선생이 항상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공은 신씨의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마침내 암혈의 선비가 되었으니 우리들 가운데 명철보신(明哲保身)한 자라고 이를수 있다. 어찌 이사람의 높은 표상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대명,홍무 이십사년(서기1391년)신미 가을 팔월 임인에 장단 봉암동에서 졸하니 향년 88세다. 호를 봉암 이라 한다. 공의 배위는 연일 정씨 대언(벼슬이름)문주의 딸이요.포은 몽주의 종질녀이다. 딸은 평리 윤지겸에게출가 했고 아들 책(策)은 판전교부사요,배는 차씨이니 이남을 낳았다. 장남은 경(涇)이요.차남은 온(溫)이요.지겸은 이자를 두었는데 원성백 개국공신 기신과 좌찬성 흥신이다.

                             외손 전조의 신하 장령(掌令)서견(徐甄)이 삼가 씀

고려 공민조 최 공 사위(士威)는 서경 유수가 되어 정치가 통명하고 사람이 화목하며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드러났고 풍도와 자태가 맑고 고우며 문학으로써 세상에 드러나서 벼슬이 중서시랑 동평 장사겸 판삼사좌사 에 이르렀다.

신 씨 조정 에 사람들이모두 군자로 명쾌한 자라고 칭찬하며 혹은 서포선생 혹은 봉암 선생 이라고 칭 하였으니 대저 봉암동이 장단부 서강 연포 서쪽언덕 어선이 왕래하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충렬공 김방경 이 추밀사 김연우 와 더불어 이 동리에 대대로 살았는데 원종 말년에 김공영규 가 서경 으로 나가 학도들을 교육 할때 봉황 한 쌍 이 대장동바위 뒤에서 울고 김사형 사안 사량과 몇 최 공 사위가 출생하니 당시에 사람들이 대장동을 봉암동이라 칭하고 혹은 봉황 암 이라고 칭 하였다.시랑공이 위조(우왕(禑王)조정)에서 벼슬 하지 않고 사문 을 일으키고 예의를 가르치는 것으로써 자기 책임으로 삼았는데 문생 하륜 등이 공을 봉암 선생 이라 하고 집을 복자당 정자를 부흥 이라 불렀으니 의미를 붙인 곳 아님이 없다. 문생 이첨의 부흥정 시에 가로대 낮과 밤으로 화한 바람이 이르니 꽃과 버들이 고운 자태를 머금었다. 방황 하며 지난 일에 감동하는 것은 이 정자 비어서 터만 남는 것 강론하던 말씀 지금은 적막하니 어떤 사람이 여기에 이를까 ?강산 에 다시 주인이 없으니 소자 가 슬픈 마음 쉽게 생기네.

                                       이상은 기성문략에서 나온 것

공민왕 오년 병신(1356)에 도평의사사 최사위 로써 서경에 윤(尹)으로 삼아 그 도에 순행하며 물을적에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성을 어루만져 위엄과 은혜가 더욱 나타나니 왕이 심히 가상히 여겨 명년 정유 이월에 중서시랑겸 동평장사에 임명 하니 공은 문무를 겸한 재주로써 그 서북의 관문 을 맡은지 얼마 않되어 은대(승정원의 별칭)로 들어와 재상이 되고 나가서 이 도를 다스려 정사가 통해지고 교화가 행하여 백가지 망가진 것을 다 일으켜서 길고 긴 공리와 크고큰 혜택으로 그 임금의 덕을 보좌하고 인도하며 그 백성의 풍속을 인도하고 도왔으니 당시에 칭찬 하기를 [기자 의 유풍 이 있다]고 하였다.

                                        이상 기성문략에서 나옴.

 

 

           중직대부 종부령 공 묘지명

           

공의 휘 는 문개 이며 본계는 계림 김 씨 에서 나왔으니 즉 경순왕의 후손이다. 공의 할아버님 휘는 영규 니 고려 말렵 에 보문각대경 으로 서경 을 교수하여 지위와 덕망이 날로 무거웠다.세급 이 땅에 떨어지고 이윤이 무너져 상실 되었는데 수주가 더욱 심 하였다.공이 스스로 청 하여 나아가 다스렸는데 일년이 되지 아니하여 교화가 행하고풍속이 아름다워져 효제지향 으로 변하니 그 공덕이 최외함을 기념 하여 특별히 최로 사성을 하고 수성백을 봉하여 문혜로 시호를 하니 그때부터자손들이 수성으로 관향을 하여 수성최씨의 시작이 된 것이다.아버님의 휘는 흡 이니 고려 충렬왕 2년에 문과에 올라 충숙왕과 충혜왕양조를 두루 섬기어 관직이 정당문학찬성사에 이르렀고 어머님 여흥민 씨는 대사헌 규 의 따님 이다.공이 출생시 부터 타고난 자품이 탁월하게 빛나고 품성이 깊고 과묵하여 사람을 대하면 따뜻하기가 황창 한 봄 같고 몸가짐은 천길 높이 우뚝서서 문장 도덕이 세상에 빛나니 사람들이 다 공보의 그릇으로 지목 하였다.슬프도다 때가 말세를 당하여 아름다운 만초같은 왕풍은 땅을 쓸은 듯이 없어졌다. 공의 형님 봉암 평장사로 18조의 상소를 공민왕께 올리기를 세번 하고 드디어 장단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받들어 사문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다. 공이 그 형님이 급류에서 용맹스럽게 물러난 것을 사모하여 중직대부 종부령 으로 영도에서벼슬을 벗고 고향으로 돌아가 누워 안자 의 촌항에서 원헌의 필문을 딛고 세상사에 구애받지 않고 태연하게 도를 닦아 거문고와 글 읽기를 스스로 즐겨 임학에서 거닐고 바람과 달을 읊조리다가 일생을 마쳤다. 유택은 수원 정남면 (정송)남곡 자좌(정남면 보통리 0번지)에 있다. 아! 묘 앞에 한 조각 돌에 새겨진 비문이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공의 높은 풍도를 견디어 상상할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 에 이르러 그 산이 융릉해자에 들어가 융릉은 사도세자의 능이다. 그때 법으로는 마땅히 파서 옮겨야 할 것이나 다만, 장경왕후 윤씨 인선왕후 장씨 가다 공의 후손 외손 에서 나왔다.이것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특별히 진렴 하시고 예우 하시어 예관을 보내 제사 지내고국내의 경계를 정해 주시고 자손에게 명하여 옛날 그대로 숭봉하게 하시었으니 대개 특이한 은수 에서 나온 것이다.공의 맏아드님 선(善)은 한성소윤이고 둘째 아드님 의(義)는 호조참판 이다.선의 아들 세온은 내첨윤 이요,첨윤의 큰아들 사기는 부사이고 둘째아들 이기 는 문과한림이며 셋째아들 수기 는 현감이다.이로부터 자손이 조선에 번성하여 시례를 서로 전하고문무가 아울러 행하여 관직이 연속 되었으니 이것은 다 공의 음덕이다.지금 공의 후손 정환,영환,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는 고로 참람한 것을 피하지 않고 우 와 같이 서차 하여 감모하는 정성을 붙이노라. 명 하여 가로되, 영화로운 벼슬길을 신 벗어버리듯 하여 국가의 이로운 그릇을 거둘어 품고 건곤의 이치를 읊조리며 구산 에서 도의를 강마 하였도다.저 청산을 우러러보니 소나무가 창창 하구나 영령이 이 곳 에서 방황 하실 것이니 만절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편석에 글을 새겨 길이 전하여 뭉개지지 않게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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