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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중찬 김방경(金方慶)

by "율문" 2019. 9. 11.

4.김방경 중찬(金方慶 中贊)


金中贊諱方慶


公字本然。安東人。祖敏成。直史館。父孝印。兵部尙書,翰林學士。贈中書令。新羅王金溥十五世孫也。初仕爲式目錄事。侍中崔宗峻愛其忠謇。委以重務。歷任中外。蔚有成績。時忠敬王在江都。權臣林衍擅廢立。忠烈以世子在上國。公爲西北面兵馬使。馳赴世子所。世子請兵欲討衍罪。帝遣蒙哥篤將兵討之。世子使公爲導。未至國。聞王復位而還。初。公意天兵若渡大同江。王國必震。恐住變。奏奉聖旨。令屯西京爲聲授。毋得渡江。至是。北鄙叛民有乘亂呑國之志。誣王國謀殲天兵。叛入濟州。不如聲言出獵。過大同江掩襲王京。子女玉帛可盡得也。蒙哥篤將從之。公以違詔渡江不可。力言乃止。及王奉詔復遷松都。衍之倘三別抄叛。入海據珍島。又入濟州。公帥舟師皆討平之。拜大帥門下侍中。至元甲戌。奉帝朦征日本。擊對馬等三島。忠烈王卽位。改僉議中贊。獻俘于帝。就帶金虎符。東人帶金符自公始。丁丑。韋,盧二人。誣公與韓希愈等謀不軌。朝廷遣使鞫問。公歎曰。吾自少竭忠奉國。蒙恩極品。豈以誣服貽患於國乎。終不服。詔書徵公與韋,盧二人同赴京以辨。盧爭舌爛暴死。韋進訴中書省。旬餘亦舌爛死。人以爲天誅。公得釋還國。庚辰。詔授中奉大夫。營高麗軍都元帥。仍令再征日本。辛巳六月。進攻一岐及朴加大志賀等島。江南軍失期不及。留待其至。八月大風。戰艦漂溺過半。不復戰。公令諸舡棄甲馬。收載敗舡之卒千餘人而還。乙酉。封上洛郡開國公。明年丙戌。卒。年八十九。蕭然坐逝。諡忠烈公。天性忠直信厚。嚴毅寡言。檢身勤儉。晝不暫臥。盥濯不過一盂水。故舊不遺。有喪必往弔之。

출처;陽村先生文集 卷之三十五 東賢史略


중찬 김방경(金方慶)


공은 자(字)는 본연(本然)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은 직사관(直史館)을 지냈고, 아버지 효인(孝印)은 병부 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의 15대 손이다. 처음 벼슬은 식목 녹사(式目錄事)였는데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이 그의 충직함을 아껴서 요직을 맡겼다. 그 뒤로 내직(內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치적(治績)을 이루었다.
충경왕(忠敬王)이 강도(江都)에 있을 때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멋대로 폐립(廢立)하였는데, 이때 충렬왕은 세자로 원(元)에 가 있었다. 공은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세자가 있는 곳에 달려가 알리매, 세자가 연의 죄를 다스리고자 군대를 청하니 제(帝)가 몽가독(蒙哥篤)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세자는 공을 선도(先導)로 삼아 본국에 채 못왔을 적에 왕이 복위(復位)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처음에, 공은 원군(元軍)이 대동강을 건너면 나라가 진동되어 변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아뢰어, 원군으로 하여금 서경(西京 평양)에 주둔하여 성원(聲援)만 하게 하고 강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북 지방의 반민(叛民)들이 난을 이용하여 나라를 삼키려는 속셈으로 무고하기를,

“고려가 원군을 섬멸할 것을 도모, 배반하여 제주(濟州)로 들어가려 하니, 사냥한다 소문내고 대동강을 건너가 서울을 엄습하여 여자와 재물을 모두 얻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몽가독이 따르려 하므로 공이,

“조서(詔書)를 어기고 강을 건너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극력 반대하였으므로 중지하였다. 왕이 조서를 받들고 다시 송도(松都)로 옮겨올 때에, 연(衍)의 무리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로 들어가 웅거했다가 다시 제주로 들어가니, 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모두 쳐서 평정하였으므로 태사 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제수하였다.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갑술년(1274, 원종15)에 제의 명을 받들고 동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대마도 등 3도를 쳤다. 충렬왕이 즉위하여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삼아 제에게 포로를 바치게 하니, 제가 금호부(金虎符)
*주1)를 차게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금호부를 찬 것은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축년(1277, 충렬왕3)에 위득유(韋得儒)ㆍ노진의(盧進義) 두 사람이 공과 한희유(韓希愈)를 무고하여 ‘반역을 모의한다.’고 하므로, 원(元)에서 사자를 보내어 국문(鞫問)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받들어서, 은혜를 입어 높은 품계에 올랐는데 어찌 거짓 자복하여 나라에 환을 끼칠 수 있겠는가.”

하고, 끝까지 승복(承服)하지 않자 조서(詔書)로 공과 위ㆍ노 2인을 불러 같이 경사(京師)에 와서 변명하게 하였는데, 노는 도중에 혀가 문드러져 갑자기 죽었고, 위는 중서성(中書省)에 소장(訴狀)을 낸 지 10일 남짓하여 역시 혀가 문드러져 죽으니, 사람들은 천벌을 받았다고 하였으며, 공은 석방되어 돌아왔다.
경진년(1280, 충렬왕6)에 조서를 내려 중봉대부(中奉大夫)를 제수하여 고려군 도원수를 맡게 하고, 이어서 다시 일본을 정벌하라 하므로 신사년(1281, 충렬왕7) 6월에 진격하여 일기(壹岐) 및 박가대 지하(朴加大志賀 박다(博多)를 말함) 등의 섬을 쳤다. 강남군(江南軍)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으므로 머물러 그들을 기다리던 중, 8월에 태풍을 만나 전함(戰艦)의 반 이상이 전복되어 다시 싸울 수 없게 되자, 공은 모든 배에 영을 내려 말과 갑옷을 버리게 하고 패선(敗船)의 군졸 1천여 명을 싣고 돌아왔다. 을유년(1285, 충렬왕11)에 상락군 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다음해 병술년에 89세로 졸하였는데 조용히 앉아서 죽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공은 천성이 충직하고 미더우며 엄하고 과묵하였으며 근검으로 몸을 단속하여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았고 세수하는 물은 한 사발을 넘지 않았으며, 친구를 잊지 않고 상(喪)을 당하면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가서 조문(弔問)하였다.


[*주1)금호부(金虎符) :


번역;양촌집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東賢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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