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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공(숭한) 8세

隋城崔氏 시은공(市隱公) 행장(行狀)

by "율문" 2024. 1. 21.

최숭한(崔崇漢)

隋城崔氏 시은공(隱公) 행장(行狀)

 

시 대 : 조 선

: 1480庚子(경자) (성종11)

: 1547丁未(정미) (명종 3)

경 력 : 대가[代加]교지(敎旨) 품계(品階)3통훈대부(通訓大夫)

직 업 : 학자(學者) 문인(文人)

성 별 :

자녀 : 八男 三女

본 관 : 수성(隋城)

 

개 설

본관은 수성(隋城)이며 자()는 순수(舜壽)와 예향(禮鄕), ()는 서울에서는 시은(市隱) 향리(鄕里)에서는 항은(巷隱)이라 하였으며

()는 숭한(崇漢)이다.

조고(祖考)의 자()는 자상(子常), ()는 찬성(贊成), ()유항(有恒)이며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부친(父親)의 자()는 여회(汝晦), ()는 방촌(芳村), ()는 윤명(潤命)이며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우찬성(右贊成)이다.

부인은 풍양조씨(豊壤趙氏)이며 부()의 자()는 이원(而元), ()는 조익정(趙益貞), 시호는 공숙공(恭肅公) 한평군(漢平君)으로 이조참판(吏曺參判), 호조참판(戶曹參判), 대사헌(大司憲),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參判),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공조참판(曹參判), 춘추관동지관사(春秋館同知館事)三女 이다.

 

생애 및 활동경력사항

()1480(성종11)에 태어나 천성이 고결(高潔)하고 총명이 탁월(卓越)하여 조부(祖父)인 찬성공(贊成公) 유항(有恒)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어려서는 안으로 종숙(從叔)되는 극기재(克己齋)공의 인도를 받고 성장한 후에는 밖으로 덕수이씨(德水李氏) ()이행(李荇) ()용재(容齋)선생의 四子 ()세용(世龍)의 빙부(聘父)제공(諸公)과 더불어 사귀므로 덕성(德性)이 날로 진취(進就) 되었다. ()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문학(文學)으로 낙을 삼으며 당시 우리나라 정치가 또는 유현(儒賢)으로 유명한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가 중종(中宗)의 신임을 받으며 올바른 정치를 이루기 위하여 과거제도를 고치고 현량과(賢良科)를 보일 때에 공()도 그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받아 과거(科擧)에 나오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것을 거절하고 조공(趙公)이 하는 일이 너무 조급할 뿐 아니라 모진편이 많으므로 실수하기가 쉬우니 그것을 주의하라는 글을 보내며 충고 하기를 도수무점즉궤(導水無漸則潰)하고 책효태거즉폐(責效太遽則廢)라 하였다.(이글의 뜻은 고일데 없는 물을 급작스럽게 몰아넣으면 필경은 흩어지고, 잘못한 일을 너무 심하게 책망하면 도리어 반감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조공(趙公)도 그 말씀을 옳게 여기면서도 이행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간신(奸臣)이었던 심정(沈貞) 남곤(南袞)배의 모함에 조공(趙公)이하 유명한 유현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고 현량과(賢良科)에 참장 되었던 선비가 모두 삭관(削官)된 후에야 비로서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탄복하였으니 이 사건이 바로 기묘사화(己卯士禍)였다.

 

그 후 나라에서 은일(隱逸)로 감역(監役)과 참봉(參奉)으로 수차 제수(除授) 되었으나 다 받지 아니하고 또 아우 되는 이판공(吏判公)이나 사돈(査頓)되는 좌의정(左議政) 이행(李荇)이 벼슬을 권하였으나 거절하고 향리(鄕里)에 돌아와서 학자(學者)로서 후학(後學)을 가르침으로써 낙()을 삼았다. 그리고 다시는 서울 길에 발을 딛지 않았으며 몸이 늙고 쇠약(衰弱)하여 1547(명종3) 향년 68세 졸()하다.

 

()이 임종(臨終)할 때에 아드님 팔형제 분에게 유교(遺敎) 하기를 아무것도 끼쳐 줄 것이 없으나 다만 문인(文人)으로서 좋아하던 것이 선성(先聖)의 글뿐이라 수많은 서적이 있어 나누어 주는 것이니 너희들의 사업이 모두 이 책속에 있느니라. 아무쪼록 공명(功名)을 탐내지 말고 되도록 향리(鄕里)에 살며 권세(權勢)있는 사람을 사귀기에 급급하지 말고 행동을 비루(鄙陋)하게 하지 말며 일가(一家)에 화목하고 동성동본(同姓同本)은 백대(百代)라도 한집이니 종씨(宗氏)니 종장(宗丈)이니 하지 말고 항렬(行列)을 따라 호칭(呼稱)하라 하였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공()의 유훈(遺訓)을 지켜 옴은 물론이요, 아무리 무식하고 용렬한 사람이라도 귀한 사람이나 부자 사람 앞에 아무 이유 없이 머리를 수그리거나 허리를 굽혀서 아첨하거나 행동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다 공()의 전통을 계승(繼承)한 까닭이다.

 

당시(當時)에 공()의 가문(家門)을 살펴보면 빙부(聘父) 되시는 풍양조(豐壤趙)씨 조익정(趙益貞)이 한평군(漢平君)으로 공숙공(恭肅公)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내린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숙부(叔父)인 휘()보한()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이며 둘째분 월농공(月農公)이 무송윤씨(茂松尹氏)의 문헌공(文憲公)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인 영의정(領議政) 윤자운(尹子雲)의 증손서(曾孫婿)이고 四子 첨악공(瞻嶽公)이 당대의 좌의정(左議政) 이용재(李容齋)의 여서(女婿) 이므로 남과 같이 벼슬에 욕심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지취(持就)할 수 있었다. ()은 부친의 유훈(遺訓)을 지키려 비록 대은(大隱)은 못 되나 소은(小隱)으로 사세(四世) 동안에 아홉 분이나 일행(逸行)으로 이름이 난 것은 어느 집을 막론하고 흔히 볼 수 없는 당시 명유(名儒)이던 학남(鶴南) 한진계(韓鎭棨)가 지은 사세구일전서문(四世九逸傳序文)에 잘 나타나 있다.

 

()八男 三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세광(世光), 세홍(世弘), 세웅(世雄), 세룡(世龍), 세암(世巖), 세석(世石), 세연(世連), 세강(世綱)이며, 딸들은 군수 윤택(尹澤), 감찰 목함(睦諴) 증 참판 허령(許鈴)에게 시집갔다.

장자(長子) 세광(世光)四男 三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제() () ) ()이고, 딸은 위(李渭), 소린(蘇潾), 이언경(李彦慶) 에게 시집을 갔다.

차자(次子) 세홍(世弘)二男 三女를 낳았는데 아들은 연()과 참봉 호()이며, 딸은 청풍수(淸風守), 우정신(禹貞臣), 김귀일(金貴一)에게 시집을 갔다.

삼자(三子)세웅(世雄)二男를 낳았는데 업()과 도()이다.

사자(四子)세룡(世龍)一男 三女를 낳으셨는데 아들 참봉(參奉) ()이고, 딸은 윤기신(尹起莘), 허계(許系), 현령 유영(柳泳)에게 시집을 갔다. 오자(五子)세암(世巖)과 육자(六子)세석(世石), 칠자(七子)세연(世連), 팔자(八子)세강(世綱)은 북한(北韓)에 거주(居住)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의 행방(行方)을 찾을 수 없다.

 

()1545(명종1) 아우 휘()보한(輔漢) 수산군(隨山君)이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재직할 때 대가(代加) 3(正三品)통훈대부(通訓大夫) 교지(敎旨)를 받았으나 훈구파. 사림파의 당파싸움에 화를 면하시기 위하여 교지(敎旨)를 숨기고 후대에 전하라 하다.

 

묘소(墓所)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신리(萬義 草幕洞)에 건좌쌍봉(乾坐雙封)으로 있던 것을 도시개발로 인하여 20101012일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하색리 588-1번지로 묘지(墓地)를 건좌합봉(乾坐合封)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사당(祠堂)20131230일 가평군 가평읍 진동안길 107(하색리552-2)번지에 건립하고 매년 음력103일에 세일사(歲一事)를 봉행하다.

 

서기(西紀) 2019(己亥) 3월 일

약력소개

수성최씨 대종회 족보 편찬위원. 이사. 찬성공(贊成公)종중 부회장 시은공(隱公)종중 회장 공()의 사남(四男) 첨악공(瞻嶽)14세손(世孫) () 율문(栗文) 관혁(寬爀)16세손(世孫) ()우생(又生) 덕희(德喜) 공동(共同) 수정편찬(修正編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