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봉암공(원개)3세 안양공파(경)5세

수성최씨 시조5세 경 經(안양공)

by "율문" 2012. 7. 3.

 

 

 

 

 

 

 

 

 

본관 ; 수성최씨

휘는 ; 경 (經)

호는 ; (안양공)

공께서는 나시면서 천자가 탁월 하시고 품성이 충효로우사 봉암공 의 가훈을 이어받아 문장과 도덕이 당세에 제일이셨으며 특히 과두문자 해서 인물화 에 뛰어난 재주는 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할 정도로 높이 경지에 도달하셨다.

태종 十四년 (1414)에 생원시 급제하신 후 세조1년 1455에 왕이 원종공신 부사직에 자급을 더하고 세조 9년(1463)에 도화원 별좌로 예에 따라 자급을 더하였으니 이는 세조가 공과 안귀생에게 내린 명을 받들어 소헌황후 세조대왕 예종대왕 의경왕 의 영정을 그린공이 이였음이다.

 

세조가 그 아드님 덕종이 일찍죽은 것을 슬퍼하사 공으로 하여금 그 초상화을 그려서 두었던바 그후 성종이 왕위에 오른지 3년(1472)년에 덕종의 영정을 공으로 하여금 추사케하여 보시고 말씀하시기을 내가 태여난지 한달도 못되어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천안을 뵙지 못한것이 한이 되더니 오늘 방불한 천안을 뵙게 된 것은 다 최공의 공이라 하시고 축을 만들고 표구를 꾸민 다음 의위를 갖추어 선워전(조선왕조 초상화 모신 궁전)의 선왕 선후 의 다음에 봉안 하였다

왕이 슬퍼하시고 사모하기를 다 할테가 없어 눈물을 흘리시며 공과 안귀생에게 관직을 당상관으로 올려 주도록 명령하시고 안마를 하사 하시니 안으로는 삼궁으로부터 아래로는 조정에 신하에 리르기까지 보고 들음에 슬푼 감회를 일으키지 않은이가 없다.

 

성종 21년(1490)에 공을 절충장군(정3품)을 삼으시고 그후 수충보조공신  자헌대부병조판서  수성군에 추증되셨으며 시호을 안양으로 내리셨다.

배위는 증 정부인 선산김씨시며 경력 광발의 다님으로 묘는 진위군 송탄면 도일리 술좌원에 상하로 모셨다.

 

사자를 두셨는데 장자는 휘 유림은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지내셨고 수성군에 추증되셨으며 시호를 안양이라 하셨고  차자 휘는 유용은 가산군수로 병조찬의에 추증 되셨고 삼자 휘는 유항은 연일 갈령 함종 안주 사군을 역임하신후 숭정대부 좌찬성에 추증되셨으며 사자 휘 유근은 남원부사 를 지내셨다.

 

유림의 자 윤신은 일행으로 천망 되시어 사헌부 집의 제수되셨으며 유용의 자 윤종은 감역이였으며

유항의 자 윤명은 은일로 천망되시어 동궁위솔 이셨으며 우의정 겸세자사부 에 추증되셨으며 유근의 장자 윤지는 도호부사이셨으며 차자 윤영은 통덕랑 이셨다. 이로부터 내외 자손이 번연하야 극가의 동량이 되는 촉망받은 인사가 많이 배출되였다.

 

아 공의 아름다운 덕행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지만 여러번 병화를 격다보니 집안에 전해오는 문헌은 전부 유실되었고 국사나 야사에 보존된 것이 十여가지에 불과 하므로 종손 완희씨 가 종중의 제손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밝히지 못한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여러방면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나에게 행장을 찬해 줄것을 간청하므로 내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간략하게 서술하노라.

 

1934년 12월 가선대부 이조참판 규장각 직제학 세자시 강원검교 여흥 민병승 찬

 

수성군(隋城君) 근제(謹齎)공의 행장은   갑인보에 이미 수록되여 있으나 관계나 행적등이 불분명함으로 수성군 회장인 원지씨가 규장각에서 새로운 자료를 발췌하여 좀더 자세한 기록을 남겨줄 것을 요청함으로 기존 내용과 임수된 자료를 첨삭 하여 둔사졸필로 외람되이 새로 행장을 엮개된 것임

 

서기 ; 2006년 12월

문혜공 25세손 찬성공파 성균관전학 국봉 원기 삼가 풀어 씀

 

 

수성최씨 족보 부록편 ; 안양공행장 편105 ~106 ~107 ~108페이지 참조

옴긴이 ; 수성최씨 대종회 대의원 (昭淡)崔   寬    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