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 반 상 식

춘천의 지명( 洞·面 )연혁,지명유래

by "율문" 2012. 7. 27.

 

 

춘천의 지명( 洞·面 )연혁,지명유래

 

춘천의 지명( 洞·面 )연혁

* 동 연혁

 

 ▶  중앙동(中央洞)

   1946년 6월 1일 춘천읍이 춘천부로 승격되면서, 군정법령에 의하여 옥천동, 요선동, 중앙로1가 등 4개 동은 1973년 12월 31일까지 옥천, 중앙, 봉의, 요선동이라는행정동으로 불렀다. 1974년 1월 1일 현재의 행정동인 중앙동으로 발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옥천동(玉泉洞)

   본래 춘천군은 부내면(춘천읍)의 중심지 격으로 춘천도호부의 관아가있었으므로 아골말 또는 아동(衙洞)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서 아동리(衙洞里)라 했다. 1939년 춘천읍제 실시에 따라 셋으로갈랐다. 대성정(교동), 봉의정(봉의동), 단양정(丹陽정)으로 정했다.1946년 왜식 동명을 변경할 때 옥천동으로 고쳤다.

 

 ▶ 요선동(要仙洞)

   본래 춘천군 부내면(府內面) 지역으로 요선당(要仙堂)이 있었으므로 요선당리라했다. 1930년 읍제 실시에 의하여 화원정(花園町) 일정목(一丁目)이라 했다가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해 요선동으로 고쳤다.

 

 ▶ 봉의동(鳳儀洞)

   춘천도호부 아동리의 일부였다. 1939년 아동리를 갈라서 봉의정(鳳儀町)이라 하였으며, 봉의산 밑에 있으므로 봉의동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변경할 때 정(町)을 동(洞)으로 고쳐 봉의동이라고 했다.

 

 ▶ 중앙로1가(中央路一街)

   본래 춘천군 부내면(춘천읍)의 지역으로 중앙로라는 현대식 이름이 생기기 전까지는 허문(虛門) 또는 허문리라고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허문리라고 했다. 1939년 읍제를 실시할 때 본정일정목(本町一丁目)이라고 했다. 1946년 왜식동명을 변경할 때 중앙로라고 했다. 춘천의 중앙이 되므로 중앙의 이름을 활용해서그대로 중앙로1가로 정했다.

 

▶  교동(校洞)

   본래 춘천군 부내면 지역이다. 춘천의 향교(鄕校)가 있었으므로 향교골 또는 교동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아동리에 편입했었다. 1939년 춘천읍제제 실시에 따라 대성정일정목(大成町一丁目)이라 했다가1946년 왜식 동명을 폐기하고 우리의 지명을 회복시킬 때 교동으로 고쳤다.

 

조운동(朝雲洞)

   조운동은 법정동인 조양동(朝陽洞)과 운교동(雲橋洞)을 합하여 조운동이 되었다.1973년 12월 31일까지는 조양, 운교동이라고 정했다. 1974년 1월 1일 조례 제621호에 의해 조운동으로 개칭하였다.

 

 ▶운교동(雲橋洞)

   본래 춘천군 부내면(춘천읍)의 지역이다. 지금은 완전히 복개되어 보이지 않으나  운교천을 건너는 구름다리가 있었으므로 구름다리가 마을이름이었는데 후에 한자를고쳐서 운교동으로 불렀다.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대성정이정목(大成町二丁目)이라고 칭하다가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운교동으로 정했다.

 

 ▶조양동(朝陽洞)

   조양동은 원래 춘천군 부내면(춘천읍)의 지역으로 대파니, 대판리(大板里) 지역이었다. 대파니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판리로 정했다.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가연리(可淵里, 佳淵里라고도 함)와 낙원동(樂園洞)의 일부를 병합하여대화정일정목(大和町一丁目)으로 고쳤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때 조양동으로 정했다. 조양(朝陽)이란 본래 '산(山의 동쪽' 즉, 아침 햇빛이 잘 드는 곳을 말한다.

 

▶  약사동(藥司洞)

   약사동은 춘천군 부내면(춘천읍)의 지역으로 조선왕조 때는 일종의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인 약사원(藥司院)이 있었다. 이에 약사원이 있었으므로 약사리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내면(東內面)의 석사리(碩士里) 일부와 남부내면(南府內面)의 상퇴계리(上退溪里)의 일부를 폐합하여 약사리라 했다.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욱정(旭町)이라고 하였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지명으로고칠 때 약사동으로 정했다.

 

▶  죽림동(竹林洞)

   본래 춘천군 부내면(춘천읍)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연리에 편입되었다.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의하여 가연리에서 갈라져 대화정이정목(大和町二丁目)으로 되었다가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지명으로 고칠 때 죽림동으로 정했다. 이후 1955년 죽림중서동(竹林中西洞)이라고 하다가 1974. 1. 1일자 조례 제621호에 의하여 현재의 동으로 편제되었다.

 

 ▶ 중앙로2가(中央路二街)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가연리의 일부를 갈라서 본정이정목(本町二丁目)이라 했다가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지명으로 고칠 때 중앙로2가로 고쳤다.

 

 ▶ 중앙로3가(中央路三街)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서 가연리의 일부를 갈라 본정삼정목이라 했다.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지명으로 고칠 때 중앙로3가로 정했다.

 

▶  소낙동(昭樂洞)

   1974년 1월 1일 춘천시 조례 제621호에 의거 소양로3가, 소양로4가, 낙원동 등 3개의 법정동을 합쳐 행정동인 소낙동이 만들어졌다. 1946년 6월 1일 군정법령으로 춘천읍이 춘천부로 승격될 때 소양로 3·4가 및 낙원동은 소양로 3·4가 동과 낙원동으로 2개동으로 분리 운영되었다. 1973년 말까지 2개 동으로 운영되었다.

 

 ▶ 소양로3가(昭陽路三街)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사창리(司倉里) 일부를 갈라서 소양통삼정목(昭陽通三丁目)이라 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지명으로. 고칠 때 소양로3가로 정했다.

 

 ▶ 소양로4가(昭陽路四街 )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전평리(前坪里)의 일부를 갈라 소양통사정목이라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소양로4가로 정했다.

 

 ▶ 낙원동(樂園洞)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가연리(佳淵里)의 일부를 갈라서 화원정이정목(花園町二丁目)이라 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낙원동으로 정했다.낙원동이라는 이름은 1946년 새로 생겨난 이름이다.

 

▶  근화동(槿花洞)

  춘천군 부내면(춘천읍) 지역으로 춘천읍내의 앞 들에 있었으므로 앞두루 또는 한자화해서 전평(前坪)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죽전리(竹田里)와 수동리(水洞里)를 젼평리(前坪里)에 통합하였다. 1930년 영락정(永樂정)으로 고쳤다가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근화동으로 정했다. 종전의 근화1구 지역은 호반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  소양동(昭陽洞)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요선당리(要仙堂里)와 사창리(司倉里)의 일부를 합쳐서 소양통이정목(昭陽通二丁目)이라 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소양로2가로 고쳤다. 1974년 1월 1일에 조례 621호에 의거, 법정동인 소양로2가 전지역을 행정동인 소양동으로 정했다.

 

▶  호반동(湖畔洞)

   1939년 춘천 읍제를 실시하면서 전평리(前坪里)의 일부를 나누어 소양통일정목(昭陽通一丁目)이라고 하다가 1946년 6월 1일 군정법령에 의해 춘천읍이 춘천부로승격되면서 법정동인 소양로1가가 되었고, 1973년 춘성군 서면의 중도가 춘천시에편입되면서 근화1구의 일부, 중도 등의 3개 구역을 합하여 행정동인 소(昭)1·근(槿)1·중도동(中島洞)이라는 행정동명을 쓰다가 1974년 1월 1일 조례 제621호에 따라 현의 호반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 근화동(槿花洞 : 1구지역)

   1973년 춘성군 서면의 중도가 춘천시에 편입되면서 근화1구의 일부와 소양로1가 지역이 합해져서 소(昭)1·근(槿)1·중도동(中島洞)이라는 행정동명을 쓰다가 1974년1월 1일 조례 제621호에 따라 현재의 호반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 소양로1가(昭陽路一街)

   1939년 춘천 읍제 실시에 따라 전평리의 일부를 갈라서 조양통일정목이라 했다.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소양로1가로 정했다. 소양로1가는 소양강이라는 명칭의 1번지라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소양1교·소양2교·소양정·소양강창등의 이름이 모두 소양강에서 유래했고, 소양로1가에 소양이라는 이름이 집중되어있다.

 

 ▶ 중도(中島)

   춘천군 서면에 속했던 것이 1973년 춘천시에 편입되었다. 소양강과 자양강이 흐르면서 만든 삼각주로 의암호가 생기기 전에는 소양강으로 나룻배가 건너다녔다. 농토가 비옥해서 농사가 잘 되었다. 의암호가 생긴 후에는 호수 안의 섬이 되었다. 적석총이 정비되고 청소년 야영장이 건설되어 유원지로 변했다. 삼천동에서 중도간에는 정기 여객선이 운항된다.

 

▶  후평1동(後坪一洞)

   후평1동은 춘천군 부내면(춘천읍)지역으로 뒷두루, 뒷들, 후평이라고불렀다. 봉의산 뒤쪽이 되고 또 읍내에서 뒤쪽이 되므로 뒷두루, 뒷들, 후평(後坪)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안리(保安里)를병합하여 후평리라 했다. 1939년 읍제 실시에 따라 일출정(日出町)이라 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후평동으로 정했다. 후평공단을 비롯하여 속속 주택단지가 생겨 인구과밀현상이 발생하여 1986년 1월 1일부터 조례 1337호에 따라 후평1동·2동으로 분리되었다.

 

▶  후평2동((後坪二洞)

   뒷두루, 뒷들, 후평1동과 지명유래를 같이 한다. 신거주지 개발로 인구밀집이 심화되어 1986년 1월 1일 시조례 1337호에 의거, 후평1동·2동으로 분동되었다.

 

▶  효자1동(孝子一洞)

   춘천군 부내면(춘천읍) 지역으로 효자정문이 있어 효자문거리라고 불렀다.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약사리(藥司里)에 편입되었다가 1939년수정(壽町)이라는 왜식 동명을 사용하였으나 1946년 6월 1일에 군정법령에의하여 갈라져 효자동이 되었다. 1970년 7월 1일 시조례 365호에효자1구· 2구· 3구로 나눌 때 효자1구가 되었으며, 1974년 1월 시조례621호에 의거, 효자1동이 되었다.

 

▶  효자2동(孝子二洞)

   1970년 7월 1일 시조례 제365호에 의거, 효자1구·2구·3구로 나눌 때 효자2구가 되었으며, 1974년 1월 1일부터 시조례 621호에 의해 현재의 효자2동 이름을 갖게 되었다.

 

▶  효자3동(孝子三洞)

   1970년 7월 1일 시조례 제365호에 의거, 효자1구·2구·3구로 나눌 때 효자3구가 되었으며, 1974년 1월 1일부터 시조례 621호에 의해 분리되어 효자3동이 되었다.

 

▶  석사동(碩士洞)

   춘천군 동내면 지역으로 벌판에 돌과 모래가 많으므로 벌말, 석사리(碩沙里)라 했다.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석리(支石里)와 남부내면(南府內面)의 상퇴계리(上退溪里) 일부를 병합하여 석사리라 했다. 부내면(춘천읍)에 편입되었고, 1939년읍제 실시에 따라 석사리를 석사동으로 고쳤다. 1988년 석사동 택지개발을 시점으로 주거지역으로 변했다.

 

▶  퇴계동(退溪洞)

   춘천군 남부내면 지역으로 곰지내(공지천)이 동북쪽으로 물러갔으므로 무린개, 물린계, 무릉계(武陵溪)라 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부내면의 약사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퇴계리라 하여 신남면(新南面)에 편입했다. 1939년춘천읍에 편입되어 퇴계정(退溪町)이라 했다가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이름으로 고칠 때 퇴계동으로 정했다. 퇴계 이황의 외가고을로 퇴계가여기까지 와서 지냈으므로 퇴계동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지만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  온의동(溫衣洞)

  춘천군 남부내면(南府內面) 지역으로 오눗골, 오뉫골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신남면(新南面) 칠전리(漆田里)에 편입되었다. 1939년 춘천읍에 편입되어 상반정(常盤町)이라 했다가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온의동으로 정했다. 1990년부터 온의·퇴계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크게 변모하고 있다.

 

▶  삼천동(三川洞)

   삼천동은 원래 춘천군 남부내면 지역으로 마삼내, 마삼천(麻三川)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강창리(江倉里), 농암리(籠岩里)와 양지변리(陽之邊里), 송현리(松峴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삼정리(三井里)로 하고 신남면에 편입하였다.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춘천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6월 8일 춘천시 조례 제608호에 의거, 삼천동으로 명명되었다.

 

▶  칠송동(漆松洞)

   칠송동은 대통령령 제6452호0973. 3. 12. 공포)로 춘천군 신동면 칠전리와 송암리가 춘천시에 편입되어 1973년 6월 8일 춘천시 조례 제608호에 의거 칠전·송암동이라는 행정동이 되었다가 1973년 11월 7일 춘천시 조례 제621호에 의거, 1974년 1월1일부터 칠송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칠전리(漆田里)

   본래 춘천군 남부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상칠전리, 하칠전리와남내일작면(南內一作面)의 창천리(倉川里)를 병합하여 신남(신동)면에 편입되었다.1973년 3월 12일 춘천시에 편입되었다.

 

▶ 송암리(松岩里)

   춘천군 남내일작면(南內一作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천동리(泉洞里),별동리(鱉洞里)와 송현리(松峴里), 은지변리(隱之邊里), 마삼천리(麻三川里)의일부를 병합하여 송암리라 하고, 신남(신동)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3월 12일에 춘천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  사우동(司牛洞)

   우두동 일부 지역과 사농동 일부지역을 합쳐 사2·우2동이라 칭하다가 1973년 12월 7일 춘천시 조례 제621호에 의거, 1974년 1월 1일부터 현재의 행정동 명칭인 사우동으로 불리고 있다. 화천에서 흘러오는 자양강 물과 양구에서 흘러오는 소양강물이 합류되는 지역에 위치한다.

 

▶  우두동(牛頭洞)

   본래 춘천군 북내면(北內面)의 지역으로 소머리, 쐬머리, 우두리라 했다. 1914년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두상리(牛頭上里), 우두하리(牛頭下里)와 우두중리(牛頭中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우두리라 하고 신북면(新北面)에 편입하였다가 1939년 읍제실시에 따라 우두정으로 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우두동이라 했다.

 

  사농동(司農洞)

   춘천군 북내 일작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적리(馬跡里), 옥산포(玉山浦)와 우두중리(牛頭中里) 일부를 병합하여 마적과 옥산의 이름을 따서 마산리(馬山里)라 하고, 신북면에 편입하였다가 1939년 춘천읍에 편입되면서 마산정(馬山町)이라 했다. 1946년 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고칠 때 사농동으로 정했다.

 

▶  신동(新洞)

   춘천군 북내 일작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한계리(寒溪里)·동포리(銅浦里)·칠산리(漆山里)를 병합하여 신동리(新銅里)라 하고 신북면에 편입했다가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로 춘천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6월 8일 춘천시제608호에 의거, 같은 해 7월 1일에 신동(新洞)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신동이라는 행정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동까지 4차선 도로가 확장되어 새로운 시가 형성되어가고 있다.

 

* 면 연혁

 

▶  동면(東面)

   동면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보면 동산외면(東山外面)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당시 동산외면은 지금의 동면과 동산면을 포괄하는 면이어서 만법(萬法), 학곡(鶴谷), 지내(枝內), 이십곡(二十谷), 품곡(品谷), 말걸(末傑) 상걸은(上傑隱), 하걸은(下傑隱), 북방(北方), 풍천(楓川), 상명암(上鳴巖), 하명암(下鳴巖), 원창리(原昌里) 등 13개리를 관할하였다. 그후 1985년 8월 지방제도를 개정하여 23부를 폐하고13도를 둠에 따라 강원도 춘천군이 되면서 동산외일작(東山外一作), 동산외이작면(東山外二作面)으로 분해하여 동산외일작면은 상천곡(上泉谷)·하천곡(下川谷)·만법·장항(獐項) · 학곡· 지내 · 이십곡· 월곡(月谷) · 상품곡(上品谷) · 안현(鞍峴) · 말걸 (末傑) · 판항(板項)·군자곡(君子谷)·종자(宗子)의 15개리를 관할하고 동산외이작면은 신리(辛梨)·평촌(坪村)·상걸·원창·상명암·하명암·부사원(府司院)·북방·풍천의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倭政時) 군, 면 폐합에 따라 이작면에 속해 있던 신이, 평촌, 상걸의 3개리를 일작면으로 편입시켜 만천리(萬法)를 비롯한 10개리를 관할하다가 1917년 면명을 동면이라 개칭하였으며 이때 이작면은 동산면이 되었다. 1964년 2월 1일 품안(品安)출장소를 개설하여 민원사무에 편익을 도모하던 중 소양댐 수몰로 인하여 출장소를 상걸리로 이전, 상걸출장소라 개칭하였으며 현재 1개 출장소, 10개 법정리, 18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  동산면(東山面)

   동면과 같이 춘천부 동산외면에 속한 지역이었는데 1895년 8월에 동산외이면으로 분할되면서 신리, 평촌, 상걸, 원창, 상명암, 하명암, 부사원, 북방, 풍천의 9개리를관할하게 되었다.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신이·평촌·상걸 3개리가 동산외일작면(동면)으로 이관되고, 남산외일작면의 군자곡·종자 2개리와 남내이작면의 구암(鳩岩)·갈동(葛洞)의 24개리를 병합하여 원창·조양·봉명·북방·풍천·군자의 6개리로 개편하고 1917년에 동산면이라 개칭되었다. 1964년 2월 1일 북방출장소를 개소하였으나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개편으로 북방·풍천리를 홍천군으로 이관하고, 북방출장소를 폐쇄하고, 원창·조양·봉암·군자의 4개 법정리, 14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  신동면(新東面)

   조선후기에 대체로 동내면과 남내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914년 남내일작면의정족(鼎足) ·고청 (古靑) · 지품(地品) · 신암(新岩) · 천동(泉洞) · 별동(鱉洞) ·송현(松峴) ·은지변(隱之邊)·마삼천(麻三川)의 9개리와 남내이작면의 팔미(八味)·증리(甑里)·혈동(穴洞)의 3개리, 부내면의 약사원리(藥司院里)를 병합하여 신남면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8개리로 재편성하였으니, 정족·송암·팔미·증리·혈동·삼천·필전·퇴계리였다. 1939년 10월 1일 퇴계리를 춘천읍으로 이관하고, 거두(擧頭)·신촌·고은(古隱)·사암(沙岩)·학곡의 5개리와 남산외이작면의 의암리(衣岩里)를 편입시켜 신동면이라개칭하여 13개리를 관할하게 하였다. 1964년 2월 1일 신촌출장소를 개소하여 전 동내지역을관할하도록 하였으며, 1973년 칠전·송암·삼천 3개리를 춘천시에 이관하여10개리(27행정리)를 관할하다가 1989년 4월 1일 다시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신촌출장소 관할구역이 동내면으로 승격, 신동면으로부터 분할되어 5개 법정리, 12개 행정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  동내면(東內面)

   18세기 중반 동내면은 지석(支石)·두음곡(豆音谷)·사예(沙猊)·암곡(巖谷)·내동(內洞)·고은동(古隱洞)·후웅곡(後熊谷)·거두곡(巨豆谷)·석사리(碩士里) 등 9개리를 관할하였으나 후에 약간의 변화를 거쳐 개편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1912년에 간행된『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석사·거두곡·후상(後上)·후중(後中)·신촌(新村)·후하(後下) · 고은동(古隱洞) · 내동(內洞) · 암곡(岩谷) · 사열 (沙悅) ·두음곡· 지석 리 (支石里) 등 12개리가 편제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부내면에 폐합되었으며, 1939년 10월 1일 퇴계리를 춘천읍으로 이관하고 거두(擧頭), 신촌, 고은(古隱),사암(沙岩), 학곡의 5개리와 남산외이작면의 의암리(衣岩里)를 편입시켜 신동면이라 개칭하여 13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64년 2월 1일 신촌출장소를 개설하여 출장소 관할에 속하다 1989년 4월 1일 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동내면이라는 옛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다. 통합과 분할과정에서도 5개 법정리는 변동이 없고, 15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  남면(南面)

   조선후기 18세기 중반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당시는 남산외면으로 군자곡리(君子谷里), 추곡리(楸谷里), 사동리(寺洞里), 관천리(冠川里), 방하곡리(芳下谷里), 서사천리(西士川里), 하방곡리(下芳谷里), 상방곡리(上芳谷里) 등 8개리가 있었으나 고종 32년 실시한 관제개정에 의하여 남산외일작면과 남산외이작면으로 분할하여 일작면은 수동(壽洞), 후동(後洞), 유대곡(柳垈谷), 항곡(恒谷), 가지동(加之洞), 한덕(漢德), 추곡, 통곡(通谷), 섬배(蟾背), 후대곡(後垈谷), 광판(光板),법소(法所), 반의(班依), 군자곡, 종자 등 15개리를 관할하였다. 이작면은 관천(冠川), 박암(博岩), 하방곡상리(下芳谷上里), 하방곡하리, 서토천하리(西土川下里), 방하(芳荷), 서토천상리, 하방곡, 수동의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일작면의 군자곡·종자 2개리를 이작면으로 넘겨주고,이작면의 관천·박암의 2개리를 일작면에 편입하여 남산외일작면은 관천·박암·가정(柯亭)·후동·발산(鉢山)·한덕 ·추곡·통곡·행촌(杏村)·광판의 10개리를, 남산외이작면은 의암·마곡·갈동의 3개리를 편입하여 의암·마곡·갈동·강촌·방곡·창촌·수동·백양·서천·방하의 10개리를 관할하였다. 1917년 면명을 개정하여 남산외일작면을 남면으로, 남산외이작면을 남산면으로 하였다가 1934년 다시 두 면을 통합하여 남면이라칭하고 남산면에 속해 있던 의암리를 신동면에 이관하고, 관천·박암·가정·발산·후동·한덕·통곡·추곡·행촌·광판·창촌·방곡·강촌·수동·백양·서천·방하의 17개 리를 관할하는 거대한 면으로 광복과 6.25동란을 거쳤다.

   1967년 12월 5일 발산출장소를 개설, 현재의 남면지역을 관할하고 본면에서는 현재의 남산면지역을 관할하였다. 1989년 4월 1일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발산출장소가남면으로 승격되고 남면은 옛 명칭대로 남산면이 되었다. 관천, 박암, 가정, 발산, 후동, 추동, 한덕리의 7개 법정리(11개 행정리)를 관할하여 오늘에 이른다.

 

▶  남산면(南山面)

   남산면은 『여지도서』에 의하면 남산외면 지역으로 당시는 군자곡리·추곡리·사동리·관천리·방하곡리·서사천리·하방곡리·상방곡리 등 8개리였으나, 고종 32년(1895)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남산외일작면과 남산외이작면으로 분할하여 남산외일작면은 수동·후동·유대곡·항곡·가지동·한덕 ·추곡·통곡· 섬배·후대곡· 광판· 법소· 반의·군자곡·종자 등 15개리를 관할하고, 이작면은 관천·박의암·하방곡상리·하방곡하리·서토천하리·방하·서토천상리·하방곡·수동의 9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남산외이작면의 군자곡·종자의 2개리를 동산외이작면에 넘겨주고, 남산외이작면의 관천·박암의 2개리를 남산외일작면에 편입토록 하여남산외 일작면은 관천·박암·가정·후동·발산·한덕·추곡·통곡·행촌·광판의 10개 리를, 남산외이작면은 의암·마곡·갈동의 3개리를 편입하여 의암·강촌·방곡·창촌·수동·서천·백양·방하의 8개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7년 면이름을 고쳐서 남산외일작면은 남산면, 남산외이작면은 남면으로 하였다가 1939년 다시 두 면을 합하여 남면으로 하고, 남산면 관할이던 의암리는 신동면에 넘 겨두고 관천·박암·가정·후동·발산·한덕·추동·통곡·행촌·광판·강촌·방곡 · 창촌·수동·백양·서천·방하의 17개리를 관할하였고, 1957년 12월 5일 발산출장소를 개소하여 7개리를 관할하였으며, 1989년 4월 1일 발산출장소가 면으로 승격되어 출장소 관할지역은 남면으로, 본면 관할지역은 남산면으로 분할되어 현재 통곡·행촌·광판·강촌·방곡·창촌·수동·서천·백양·방하의 10개 법정리(20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  서면(西面)

   서면은 『여지도서』에 의하면 서상면(西上面)과 서하면을 합한 지역에 해당하는데 당시 서상면에는 수정 (水井 )·월굴(月屈 )·화천(花川)·향천(香川 )·반송(盤松 )·오매 (梧梅)· 사(沙) ·보가대(寶加岱) · 권산(權山) · 신포(薪浦) · 갈월(葛月)·지가암(芝可巖)·원당(院堂) 등 13개리가, 서하면에는 안보(安保)·마당(馬堂)·명월(明月)·예동(裔洞)·방동(方洞)·갈둔(葛屯)·와빈리(臥濱里) 등 7개리가 속해 있었다. 그후 고종 32년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서하면을 분할하여 서하일작면, 서하이작면이라 하여 서하일작면은 와빈·갈둔·금산·하방동·상방동·상현암·하현암·덕두원·명월의 9개리를, 이작면은 백일동·마당·고역촌·안보·탑동·율장의 6개리를 관할하게 되었고, 서상면 소속의 13개리도 분리되거나 개칭되어 18개리로 조정되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하일작면 9개리와 서하이작면 6개리를 폐합하여 금산·방동·현암·덕두원·당림(塘林)·안보의 6개리로 재편하여 서하면으로 하였고, 서상면은 종전의 18개리를 폐합하여 6개리로 조정하였다. 그후1934년 4월 1일 서상면의 지암(芝岩)·원평(圓坪) 2개리는 사북면으로 이관하고, 신매(新梅)·월송·서상·오월의 4개리를 병합하는 동시에 면명을 서면이라 개칭하여 10개리를 관할하였다.

   1964년 2월 1일 용산출장소를 개설하여 오월리를 관할토록 하고, 1965년 3월 10일덕두원출장소를 개소하여 덕두원·당림·안보리를 관할토록 하였고, 19Ⅱ년 1월 7일행정구역 개편시 현암·금산리의 일부(중도)를 춘천시로 이관하였다. 서면은 현재 10개 법정리와 23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  사북면(史北面)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시 이 지역은 사탄외면이라 하여 서오지(鋤吾芝)와 오리동(五里洞) 2개리 뿐이었다. 1895년(고종 32)에 이르러 지방관제를 면 단위까지 세분하여 행정력을 강화함에 사외면으로 개칭하고, 군량대(軍糧垈)·서오지·오리동·탄감(灘甘)의 4개리로 개편하였으나 지금의 관할구역과는 차이가 있다.

   1914년 조선총독부령에 의하여 군, 면 통폐합으로 종전의 북내이작면의 고탄상리·고탄하리·인람(仁嵐)·가일(佳日)·송암상리·송암하리의 6개리와 화천군 하서면의 서오지리, 사북면 지역을 통합하여 사외면에서 사(史)자와 북내이작에서 북(北)자를취하여 사북면이라 개칭하고, 고성·고탄·인람·가일·송암·신포·지촌·오탄의 8개리로개편하여 관할하게 되었다. 그후 1934년 4월 1일 서상면의 원평·지암의 2개리를 편입시켜 10개리가 되었으며, 1945년 광복과 더불어 38도선이 가로막아 국토가 분단되어 신포·지촌·가일·오탄의 4개리가 북한치하에 들어갔다가 1954년 11월 15일 수복되었다.

   1964년 11월 15일 인람리에 있던 면사무소는 춘천댐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 위치인 신포리로 이전하였고, 1965년 3월 10일 지암·고탄·고성·송암·인람리 지역 주민의편익을 제공하기 위하여 용산출장소를 개소하였다. 1개 출장소, 10개 법정리, 16개행정리를 관할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  신북면(新北面)

  『여지도서』에 의하면 당시는 북중면지역에 해당하여 율대(栗垈), 천구(泉丘), 산본(山本), 발산(鉢山), 장본(獐本), 유포(柳浦), 천전리(泉田里) 등 7개리가 속해 있었으나 1912년 당시는 율대리, 문정리(文廷里), 천구리(泉邱里), 산본리, 발산리, 장본리(章本里), 상유포리(上柳浦里), 하유포리, 상천전리(上泉田里), 하천전리 등 10개리로 되어 있었다.

   1914년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종전의 북중면 지역 10개리와 북내일작면 14개리를 합하여 천전, 유포, 율문, 산천, 발산, 지내, 용산, 신동, 마산, 우두의 10개리로 개편하고, 면명을 신북면이라 하였다. 그 후 1939년 10월 1일 춘천읍 확장에 의하여 우두·마산 2개리를 춘천읍으로 넘겨주고,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신동리를 또 춘천시에 이관함으로써 7개 법정리(25개 행정리)만을 관할하여 오늘에 이른다.

 

▶  북산면(北山面)

  『여지도서』에 보이는 북산외면 지역으로 당시는 부창(富昌), 건천(乾川), 내평(內坪), 사전(沙田), 오항(五項), 추곡(楸谷), 대곡(岱谷), 대동(大同), 수산(水山), 조탄(照呑), 무노곡리(無老谷里) 등 11개리가 속해 있었다. 그후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상건천(上乾川), 하건천, 부창, 여오천(汝吾川), 내평, 오항(吾項), 상추곡(上楸谷), 중추곡, 하추곡, 대곡, 대동, 수산, 사전, 조탄, 삽교(揷橋), 가협(加峽), 물노곡리(勿老谷里) 등 17개리가 속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양구군 남면의 상수내리(上水內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종전의 17개리를 재편하여 청평(淸平), 부귀(富貴), 추곡, 추전(楸田), 오항(五項), 내평, 물노(勿老), 조교(照橋), 대동, 대곡, 수산리 11개리로 개편하고 1917년 북산면이라 개칭하였다.

   1970년 7월 1일 내평리에 소재한 면사무소가 소양댐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 위치인 오항리로 이전하였고,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산리를 인제군에 이관하였으며 조교출장소를 개소하여 1개 출장소, 10개 법정리(15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춘천의 지명유래

 

    지명(地名)의 생성은 대체로 그 지역의 특수한 자연환경과 인문지리적(人文地理的)인 상황이 투영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지명을 고찰함으로써, 그 지역의 특수한 역사적인 경험과 자연지리적인 조건들을 짐작해낼 수 있는 것이다. 지명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랜동안 원음(原音)이나 어의(語義)가 변화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변화상에 있어 보수성과 연속성을 지니고있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명의 특수한 조건 때문에, 종종 언어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이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최근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지역학(地域學)의 정립과 활성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데, 지명에 대한 연구 또한 그에 따라 더욱더 활성화되리라고 믿는다. 여기에서는 각 읍면동(邑面洞)별로 주요한 지명을 추출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여 두기로 하겠다. 이 항목을 기술하기까지의 여러가지 제반 사정에 따라, 현지조사에 의한 채록은 그다지 하지 못하였다. 지명을 채록하는데에 있어서는 지역의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주요 지명을 선정하고, 아울러 이에 대한 약간의 분석을 가하는 식으로 하였음을 밝혀 둔다.

 

▶  중앙동(中央洞)

  ▷구렁고개 : 현재의 중앙로로부터 소양로 2가로 넘어가는 고개길 이름. 과거에는 이 고개길이 사창고개와 함께 소양로와 근화동 방면으로부터 도청쪽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고개길이었다. 70세 이상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의 비석거리일대에서 장(場)이 선 후, 보부상(褓負商) 등이 이 고개길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보부상"은 일재의 잔재로, "부보상"으로 써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  교동(校洞)

  ▷백고개 : 교동에서 옥천동(玉泉洞)으로 넘어가는 고개길 이름. 지금은 시(市)의 간선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오가와 게이키치의 사진자료집에 소개되어 있는 교동일대의 사진을 보면, 일제시기까지 이 지역은 봉의산(鳳儀山)으로부터 뻗어나온 작은구릉들이 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일대로부터 동면(東面)지역에 이르기까지 과수원(果樹園)이 적지 않이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볼 때, '배(梨)고개'라는 말이 경음화(硬音化)되어 '백고개'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박달재' 등과 같이, '큰 고개', '주요한 고개길' 등의 의미로서 '박고개'라고 불리던 것이 '백고개'라고 전음(轉音)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향교골 : 현재의 향교자리를 말한다. 오가와 게이키치의 사진자료집을 보면, 지금의 향교는 대성전(大成殿) 바로 뒷 편에 봉의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온 주맥산(主脈山)이 솟아 있고, 그 좌우에는 일종의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라고 할 수 있는 나즈막한 구릉이 둘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구릉에 둘러싸인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는데다가, 향교가 위치한 곳이라는 의미에서 이 일대를 '향교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동리(衙洞里) : 지금의 교동 중 춘천여자고등학교 바로 아랫쪽 일대를 과거에는 아동리라고 불렀다. 조선시기 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아전(衙前)들이 많이 밀집하여 살고 있었던 전통은 일제시기와 1945년 이후에도 이어져, 과거와는 의미가 달라졌지만, 공무원들이 적지 않이 이곳에 밀집하여 주거하였다. 이러한 주거에 있어서의특징은 1980년대 중반 교외(郊外)지역에 신흥아파트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변화하여, 현재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우물 : '큰 우물'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명칭이다. 지금의 향교 전방의 좌측 소로로 빠지는 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대 이전까지 이 일대의 주요 취수원(聚水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말탄개미 : 지금의 춘천여자고등학교에서 향교쪽으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 '말탄개미'라는 명칭은 경기도의 여주(驪州), 이천(伊川), 양평(楊平) 등과 충청북도의 일부지역, 그리고 강원 영서지역에 집중·분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대개 이러한 지명이 있는 지역은 비교적 넓은 규모의 평탄한 대지이거나 풍수상 입지조건이 좋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어느 지역의 경우에는 그 일대에서 과거 장수(將帥)들이 전쟁을 하였다는 전설이 채록되기도 하고, 고대시기의 고분들이 분포되어 있는경우가 왕왕 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볼 때, 과거(향교가 건립되기 전 시기)향교일대에 고분이 소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지금의 한림대학교 뒷 편에서 통일신라시기 석실분(石室墳)유적이 발견된 바 있음을 상기하여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마현(馬峴) : 말탄개미를 마현이라고도 하였다.

 

 

▶  조운동(朝雲洞)

  ▷대파니 : '대판리(大板里)'가 음전(音轉)되어 생겨난 지명이다. 현재의 조양동일대가 이에 해당된다. 대판리는 19세기말 춘천군 춘천읍 부내면(府內面)에 속하여 있다가, 1939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이 이루어질 때, 가연리(佳淵里), 낙원동(樂園洞)의 일부지역과 합쳐져 대화정(大和町) 1정목(丁目)이 되었고, 1946년 왜식동명변경령에 의해 조양동(朝陽洞)으로 고쳐졌다.

 

▶  약사동(藥司洞)

  ▷약사리(藥司里)고개 : 지금의 중앙시장에서 약사동쪽으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조선시대로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이 고개의 우측에 한약사(韓藥師)들이 길을 따라 한약방(韓藥房)을 열고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

 

▶  죽림동(竹林洞)

  ▷수평말 : 지금의 죽림동 천주교성당 일대의 옛 명칭. '수평말'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죽림동일대에 대숲이 우거져있었다는 전언을 통해서, 숲과 관련이 있는 명칭이 아닌가 한다. 즉, '숲이 우거진 평지'를 의미하는 '수평(수坪)'이 아닌가 한다.

  ▷가연리(佳淵里) : 지금의 죽림동성당 일대에 '가연'이란 연못이 있었던 까닭에 그 인근의 마을을 가연리라 불렀다. 전통시대에 작성된 지리지와 고지도를 참고하여 보면, '가연(佳淵)'은 '가연(可淵)'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큰 연못'이란 의미에서 '가연'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시장고개 : 죽림동에서 중앙시장으로 넘어가던 고개길 이름. 현재는 자취가 없어졌다. 이 지명은 근대시기에 들어와 생겨난 것이다.

 

▶  소낙동(昭樂洞)

  ▷미미개고개 : 중앙로에서 소양로 3가 지역으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 이 고개에는현재 간선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사창고개 : 소양로에서 요선동으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 古地圖를 보면, 이 고개길에 해당되는 부분에 사창(司倉)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연유로 이러한 고개이름이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중앙동의'구렁고개'와 함께 이 고개가 중앙로와 '앞뚜르'지역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고개길이었다고 한다. 과거 보부상들이 이 고개길로 넘나들었다고 한다.

 

▶  근화동(槿花洞)

  ▷앞뚜르 : 현재의 근화동 일대, 춘천역 일대, 미군부대 일부지역을 지칭하는 명칭.과거 이 일대는 춘천시내(과거 郡지역 제외) 지역에서는 가장 넓은 평야이었다. 지금도 도청 정상에서 바라보면, 이 지역이 하나의 들을 형성하고 있음을 한 눈에 알수 있다. 춘천 관아(官衙)에서 보기에 앞쪽에 있는 들이라는 의미에서, '앞들(前坪)'이라 불리는 것이, 춘천의 방언식(方言式) 발음에 의해 '앞뚜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앞뚜르목:물방아거리(아래 내용 참조)에서 당간지주쪽의 지형(현재 매립)이움푹 만곡되었다가 다시 강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형상으로 되어 있기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

  ▷종대 : 종(鍾)이 달려 있는 대(臺)라는 의미의 명칭. 현재의 근화동 당간지주를지칭하는 것이다.

  ▷갯대배기 : 근화동 당간지주가 있는 곳 일대를 지칭하는 명칭.

  ▷물방아거리 : 현재의 근화동 뱃터 좌측일대를 지칭하는 명칭. 20세기 중반까지현재의 근화동 뱃터 입구의 좌측에 서낭당과 물방앗간이 있었다. 물방앗간은 1950년대까지 존재하여 있었고, 서낭당은 1960년대 중반까지 존속하여 있었다. 물방아거리에 있던 서낭당은 근화동민들이 주요한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인데, 1980년대 후반까지 동제를 거의 원형대로 지냈다.

  ▷수동리(水洞里) : 물방아거리를 조선시대 수동리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이곳에서일부의 세역미(稅役米)를 날랐다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에서인지 물방아거리와 그 맞은편 강안(현재 매립)에 전통적인 관념으로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다수 살았다.

  ▷큰대문집거리 : 현재의 춘천역 합숙소(合宿所) 맞은 편에 있는 마을을 지칭하는 명칭. 일명 '이삼오식 거리'라고도 한다. 이러한 명칭이 생기게 된 까닭은 합숙소 맞은 편에 모순당택(慕舜堂宅)이 있었는데, 이 일대에서는 가장 큰 대문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명칭을 얻게 되었다. 모순당택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상당부분이 파괴되기 전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다.

  ▷밭뙈기 : 모순당택 남쪽, 현재의 근화동 유치원이 있는 거리를 지칭하는 명칭.

  ▷말무덤 : 현재의 근화동일대에는 과거 적지 않은 수의 '말무덤'이 분포하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 보충대(補充隊)가 있었던 모순당(慕舜堂) 이씨택(李氏宅) 소유의 솔밭일대, 춘천역 건너편 방위부대가 있었던 자리, 댐 공사로 강폭이 넓어져 수몰된 근화동 제방 건너편 지역에 돌과 모래가 썩어 쌓여져 있는 '말무덤'이라는 것이 다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적석총(積石塚)이 아닌가 한다.

  ▷속갯보 : 지금의 근화동 운전연습장 맞은 편 들녘에 있던 보(洑) 명칭. 모순당 이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 보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보가 만들어진이유는 보 자리를 중심으로 넓은 논이 경작되고 있었기 때문인데, 1980년대 초반까지 이용되었고, 일부지역에 물을 끌어들여, 미나리꽝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  소양동(昭陽洞)

  ▷기와집골 : 현재의 근화국민학교 길 맞은편, 소양동 3통일대를 지칭하는 명칭.1970년대 중반까지 이곳에 왜식 한옥이 집중·분포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 기와집골에는 일제시기 일본인들과 친일개화 인사들이 다수 살았다. 1945년 이후 일본인 소유의 개량 한옥들이 대량 적산처리되었다. 이 지역은 교동, 옥천동 등과 함께 일제시대 일인들의 집단 거주지로서, 지역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입장에 서있던 뜻있는 유림(儒林)으로부터 백안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백석동(白石洞) : '기와집골'을 백석동이라고도 부름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하게알려진 것이 없다. 혹 고대의 주요 지명소 중 '박(park)'과 '달(tar)'이 합성된 '박달'이 한자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한다.

  ▷비석거리 : 지금의 송덕비군(頌德碑群)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곳은 과거 이래 우두동과 서면일대의 농산물이 춘천시내로 1차 유입·거래되던 곳이었다. 1950년대까지 전통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계층의 사람들과 반점(飯店) 및 주막(酒幕)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군집하여 살았다.

  ▷주막거리 : 현재의 송덕비군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근화국민학교 방면의 노변(路邊)에 주막이 늘어서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 1930년대까지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주(酒)'자를 쓴 깃발을 내걸은 주막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고 한다.

  ▷탑거리 :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충원사지(沖圓寺址) 7층석탑이 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명칭.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을 참고하여 보면, 원래 이곳으로부터 현재의 요선터널에 이르는 능선일대는 과실수와 송림이 우거진 곳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부터 일제시기를 거쳐 최근까지 기름공장, 제재소, 철물점, 술집 등이 밀집되어 있는, 다시말해 사족(士族)들이 거처하기에는 좋지 않은 환경의 곳으로 바뀌었다.

 

▶  호반동

  ▷대나무골 : 지금의 소양 나루터와 근화국민학교 뒷편 쪽에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  후평1·2·3동

  ▷뒷뚜르 : 춘천 관아의 뒷쪽에 있는 들녘이란 의미에서 뒷뚜르라고 명칭하였다.  현재의 후평동일대 전체가 이에 해당된다.

  ▷부안:조선시대에 현재의 부안국민학교 부근에 보안역(保安驛)이 있었던 까닭에 이러한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이 일대에는 1950년대까지 보안역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군집하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토착하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이주하고 타 지역과 타 동리 사람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다.

 

▶  효자1·2·3동

  ▷말무덤 : 지금의 강원대학교 정문 쪽으로 나있는 능선에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지형지리적인 조건으로 보아, 삼국시대 후기 또는 신라시대 이후의 석실분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두하리 :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하나는 '도와리(陶瓦里)'의 음전(音轉)으로서, 과거 이 지역에서 숯을 굽거나 도기를 구웠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도화리(桃花里)'의 음전으로서, 이곳에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뚜와리'의 의미로서, 이곳의 지형이 뚜와리를 틀 듯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생기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한국지명총람』는 이 세 가지의 명칭이 모두 채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어느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아 보지 못했다. 현재의 강원대학교 정문 방면으로 나있는 능선자락일대를 지칭한다.

  ▷진등 : 강원대학교 정문 방면으로 이어져 있는 능선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진서리 : 진등의 다른 명칭. 춘천에서는 '길다'를 '질다'로, '김'을 '짐'으로 발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통해서 볼 때, '진서리'와 '진등'은 '긴 서리'와 '긴 등'의 방언식 발음이다. 효자동으로부터 강원대학교 쪽으로 나있는 능선은 나즈막하면서도 골이 많아, 과거 산능선을 타고 강원대학교 후문 방면으로 내왕하였다. 이 산 잔등의길이 20여리나 되었다고 한다.

  ▷효자문거리 : 효자동 명칭의 유래가 되는 '반효자(潘孝子)' 정문(旌門)이 있었던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현재의 강원대학교 정문 왼편쪽이다.

  ▷투구봉 : 효자동 공동묘지가 있는 산의 별칭, 산의 모양이 투구처럼 봉긋하다고하여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  석사동(碩士洞)

  ▷사기장골 : 춘천교육대학교를 지나 춘천∼홍천간 도로 좌측에 있는 군부대 안쪽의 골짜기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과거 이곳에 사기를 굽고 제조하던 곳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한국전쟁시기의 격전지이기도 한데, 1970년대까지 한국전쟁시기에 사용하던 참호와 전쟁 잔여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여우골 : 사기장골에서 강원대학교와 강원사대부속고등학교 쪽으로 나있는 골짜기 이름. 1960년대까지 이곳에 여우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스무숲 : 석사동에 소나무군락이 있었는데, 이를 스무숲이라고 하였다 한다. 구체적으로어느 지점인지를 알 수 없다.

  ▷쥐역뚜르 : 춘천∼홍천간 도로 우측에 있는 들 이름. 이곳에는 조선시대 이래 많은 논과 보(洑)가 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 택지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 있던 보로서는'상보', '중보', '쥐역뚜르보'등이 있다.

  ▷애막골 : 안화산에 있는 마을 이름. 이곳은 풍양조씨 회양공파(淮陽公派)가 춘천에 정착하고 세거한 최초의 우거지(寓居地)로서도 유명하다. 현재 이곳에는 풍양조씨 회양공파의 파조(派祖)인 조신(趙愼)의 아내 고성(固城) 이씨묘(李氏墓)가 있다.

 

▶  퇴계동(退溪洞)

  ▷무린개 : 현재의 퇴계동일대를 지칭하는 명칭, 과거 이곳에는 공지천으로 유입되는 개울물이 있었는데, 이를 '무릉계(武陵溪)라고 했다. 무릉계라는 명칭은 춘천의 고지도와 지리지상에서도 발견된다. '무린개'는 '무릉계'가 음전된 것이다.

  ▷퇴계말 : 지금은 택지개발로 없어졌으나, 과거 퇴계동의 큰 연못가에 있던 마을 이름. 1980년대 중반까지 이 곳은 도심 중의 오지(奧地)와 같아서, 산짐승들이 마을에 종종 출현할 정도였다. 지역의 일부 사족(士族)들과 당시 동민(洞民)들의 전언에 의하면, 연못가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우거(寓居)하던 정자 터가 있었다고 한다.

  ▷윗무린개 : 퇴계동 1통지역에 있던 마을 이름. 과거 우시장(牛市場) 입구쪽에 있던 마을.

  ▷아랫무린개 : 퇴계동 2·3통 지역에 있던 마을 이름.

  ▷성미골 : 현재의 남춘천역에서 남춘천국민학교 사이에 있던 마을 이름.

  ▷백석동(白石洞) : 퇴계동 국사봉(國師峰) 일대를 지칭하는 명칭.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사봉에 하얀바위가 100층을 이루고 있어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하나, 근거가 없다.

 

▶  온의동(溫衣洞)

  ▷오누골 : 온의동의 옛 이름. 지금도 70세 이상자들은 온의동을 이렇게 부른다. 노뉘골이라고도 한다.

  ▷마내 : 온의동 중심지의 서측에 있는 골짜기 이름,

  ▷선들고개 : 온의동에서 삼천동(三川洞)으로 넘어가는 고개길 이름.

  ▷장고개 : 온의동에서 춘천시 중심가쪽으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 춘천시쪽에 시장이 있었기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  삼천동(三川洞)

 ▷마삼내 : 삼천동에서 송암리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 현재 이곳에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강창골 : 현재의 베어스타운관광호텔 뒷편에 나있는 골짜기를 지칭하는 명칭.

  ▷돌고개 : '삼천유원지' 안에 있는 고개 이름. 언덕에 큰 바위가 있어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  칠송동(漆松洞)

  ▷진고개 : 칠전리(漆田里)에서 신남(新南)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길 이름.

  ▷회골 : 현재의 신남국민학교 뒷편에 있는 골짜기 이름. 이곳에서 장례용(葬禮用) 회(灰)를 구웠기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서낭고개 : 칠전리에서 신동면 증리(甑里)쪽으로 나있는 고개길 이름. 과거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기에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얼음실 : 현재의 '의암산장' 일대를 지칭한다. 이 일대가 음지(陰地)라서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샘골 : 송암동 2통 4반에 있는 골짜기 이름.

  ▷소래미 : 현재 의암호 주변을 지칭하는 명칭. 과거 이 일대에 좋은 소나무가 군집되어 있었다고 한다.

  ▷아르래이 : 현재의 옥수사(玉水寺)가 있는 골짜기 이름.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골통바우 : 송암동에서 가장 높은 산 정상에 있는 바위 이름.

  ▷자라우 : 송암리(松巖里)의 토속 명칭.

 

▶  사우동(司牛洞)

  ▷마장부락 : 현재의 사우동 1통 1·2반 일대의 마을을 지칭하는 명칭. 원래 이곳에는 '말무덤'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마적리'로 불리우다가, 다시 '마장리'로 음전되어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가라메기 : 현재의 소양중학교 앞쪽의 강안 대지를 지칭하는 명칭.

 

▶  우두동(牛頭洞)

  ▷우두벌 : 우두동일대의 평지를 지칭하는 명칭. 조선시대 춘천의 인구 집중지는 이곳이었다.

  ▷가라(加羅)목 : 가라메기의 다른 이름.

  ▷달마지봉 : 우두산(牛頭山) 북쪽 산봉우리. 정상부가 평탄하게 되어 있는데, 과거 이곳 주민들이 이곳에 올라 대보름날 달맞이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소슬뫼 : 우두산(牛頭山)의 다른 이름.

  ▷우뒷소 : 우두산 동쪽 소양강에 있는 소(沼) 명칭. 물살이 상당히 빠르고 수심이 깊다.

  ▷여우고개 : 우두동에서 신북면 율문리(栗文里)로 넘어가는 고개길 이름.

 

▶  사농동(司農洞)

  ▷가라목 : '우두동(牛頭洞)'의 해당 항목 참조.

  ▷무른데미 : 북한강변에 있던 돌무더기. 과거 이 지역의 사람들이 이 곳에 쌓여져 있는 돌을 이용해 석전(石戰)을 하였다고 한다. 중도(中島)와 신매리(新梅里)에 적석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적석총유적이 아니었는가 한다.

  ▷옥산포(玉山浦) : 조선시대 이래 춘천의 유명한 나루터이다. 북한강변 위도(蝟島)건너편에 있으며, 현재도 뱃터로 이용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 이곳에 전통적으로 도선(導船) 등의 일을 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마산리 : 옥산포 안쪽에 있던 마을 이름. 마산리라는 지명도 '말무덤' 같은 적석(積石)에서 유래한 것 같다.

 

▶  신동(新洞)

  ▷옷뫼말 : 현재의 신동 1통 일대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전통시대 이곳에서 옻나무를 많이 재배하였다고 한다. 한자식 표기로는 '칠산리(漆山里)'라고 한다. 이곳에는 원래 남양홍씨가 세거하고 있었으나, 18세기경 수성(隨城) 최씨(崔氏)들이 이주하여 와 현재까지 다수 거주하고 있다.

  ▷구리골 : 현재의 신동 2통 일대에 있는 마을 이름. 조선시대 이곳에 구리를 주조하던 가마가 있었다고 하나, 확연하지는 않다. 한국전쟁 후 '안동네'라고 별칭되었다고한다. 이곳에는 영암(靈巖) 박씨(朴氏)들이 모여 살고 있다.

  ▷한개마을 : 신동 4통 일대에 있는 마을 이름. 마을 중심부에 준용하천인 '한계천(寒溪川)'이 흐른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로부터 전주이씨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사족(士族)들이다.

  ▷되내 : 현재의 '문화방송' 송신소가 있는 지역 명칭.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