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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을사사와 2등 공신(최보한)

by "율문" 2015. 3. 14.

명종 4, 1(1546 병오 / 명 가정(嘉靖) 25) 1217(경자)

 

우찬성 최보한(崔輔漢)이 졸()하였다. 국상(國喪)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윤임(尹任)의 첩을 간통하고 음란한 짓을 자행하더니, 병이 들은 뒤에는 괴상한 말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병이 위독하자 윤임아, 어찌 나 혼자 한 짓이냐. 그만 괴롭혀라.’ 하고 헛소리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최보한은 성품이 본래 추잡하고 학행(學行)도 없었는데, 척리(戚里 왕의 내외척)에 의지하고 내간(內間)에 아부하여, 중종(中宗)이 승하한 초기에 삼공이 수릉관(守陵官)에 추천하였는데, 최보한이 병이 있다고 사직함으로써 공론에 죄를 얻어 1년이 넘도록 버려졌었다.

명종(明宗)이 즉위함에 이르러 조정의 대권이 모두 이기에게 돌아가자 최보한은 이기의 족질(族姪)로서 어두운 밤에 가서 애걸하여 훈적(勳籍)에 참여하니, 사림(士林)이 비루하게 여겼다.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그가 등용한 자는 모두 그 친속(親屬)과 내족(內族)이었으며, 청탁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문정(門庭)이 저자와 같았다. 그런데도 간관들은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없었으니 그 위세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 아비의 상()을 당하여 복은 벗었으나 완전히 복제를 마치기 전에 척속(戚屬)의 고을에 가서 걸식(乞食)하는데, 주수(主守)는 그가 복제를 다 마치지 않았다 하여 소찬(素饌)을 주었더니, 최보한이 나는 병이 있어서 벌써부터 고기를 먹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끓여 오라.’ 하므로 주수가 그 말대로 하자, 최보한은 태연하게 먹으며 조금도 부끄러움을 몰랐으니, 그 위인의 무지(無知)함이 이와 같았다.

정원에 전교하기를,

최보한에게는 특별히 치부(致賻)하되, 전례에 비해 더 많이 지급하라.”

하고, 인하여 원상(院相) 이기에게 전교하기를,

“1년 내에 훈구 대신(勳舊大臣)이 잇따라 죽고, 재변이 또 거듭 발생하였다. 국가의 액운이 이와 같으니, 조치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기가 회계하기를,

임백령(林百齡)과 최보한이 잇따라 죽고 민제인도 또 병()으로 체직되었습니다. 옛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죽으니, 국가가 쇠약해진다.’ 하였으니, 국가가 장차 어찌 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일기가 상도(常度)를 잃음이 또 이와 같으니, 신같이 무상한 자가 높은 지위에 앉아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께서 한갓 걱정만 하지 마시고, 어진 사람을 채용하여 기강을 바로 잡으면 조정이 안정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도()는 사람을 쓰는 것이 가장 중대한 일인데, 내 아직 나이 어려 사람을 알 수 없으므로 오로지 대신만을 믿을 뿐이다. 이 같은 때에 여러번 사피(辭避)하니, 내 마음이 불안하다. 군자(君子)를 등용하고 소인을 제거하는 일을 내 어찌 잘 할 수 있겠는가. 힘써 국가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이기가 또 아뢰기를,

아들은 아비가 제일 잘 알고 신하는 임금이 제일 잘 아는 법입니다. 상께서 연세가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어찌 다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요()임금 같이 총명한 분도 사악(四岳)488) 에게 자문한 것은 사람을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말을 채택하려고 그러한 것입니다. 맹자는 좌우 사람이 모두 어질다 하더라도 안 되고 여러 대부(大夫)가 모두 어질다 하더라도 안 되고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질다고 한 뒤에야 잘 살펴서 어진 점을 본 다음에 쓰라.’ 하였습니다. 상께서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납시어 학식이 고명(高明)해지면, 사람의 현부(賢否)와 그 말의 시비(是非)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경연에 나아가시길 힘써 권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상께서 만일 누가 쓸만한 사람인가를 먼저 아신 다음에 하문(下問)하신다면 신들 또한 육경(六卿)과 다시 상의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뜻이 지당하다. 상하가 모두 이 뜻을 알고 행하면 국가의 일이 잘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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