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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반 상 식

신주와 위패.지방 차이

by "율문" 2016. 11. 30.

모든 제사에는 향사(享祀) 대상자를 상징하는 신위를 설치하게 된다. 신위는 돌아가신 조상의 형체를 표상(表象)한 것이다. 신위에는 예로부터 시동(尸童), 신주(神主), 위패(位牌), 사판(祠板): 위판이라고도 함), 소상(塑像), 동상(銅像), 초상화, 지방(紙榜) 등이 사용되었고, 현대에는 사진도 사용되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중에는 이들 신위에 신이 깃들이는, 즉 의빙(依憑)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시동은 고대 중국의 풍습으로 어린아이에게 죽은 이의 옷을 입혀 시위에 앉혀서 신위로 삼는 것이다. 원시적인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조상의 영혼을 천진난만한 후손인 어린아이에게 접신케 하여 그 아이의 입을 통해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게 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듯하다.

 

신주·지방은 조상의 신령을 나타내는 신체(神體)

신주는 나무 위를 둥근 직육면체로 다듬어 그 위에 죽은 이의 친속관계, 관작과 봉사자의 이름 등을 쓴 것으로 중국 고대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신위의 상징이다. 오늘날 신주라 하면, 보통 종묘나 가묘에 모셔진 목주를 말하며 보통 밤나무나 뽕나무로 만든다. 신주는 조상의 혼이 깃들어 있는 신체로 여기어 사당이나 벽감(壁龕)에 모시고 살아계실 때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드리고, 집안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뢰기도 하였다. 이는 곧 조상으로 인식하여 살아있는 사람과 함께 집안에서 같이 생활하는 것으로 여기었다.


우리나라에 신주가 수용된 것은 유교가 들어온 삼국시대 이후로 보인다. 삼국시대에 시조(始祖)묘가 존재하였고, 신라의 경우 종묘제를 오묘제(五廟制)로 운영하고 있었던 점에서 신주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시대에는 오늘날 문묘에 모셔진 성현의 위패 대신에 당나라로부터 들어온 문선왕(공자)과 열 명의 철인(哲人), 72제자의 영정을 대학에 안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직 목주가 일반화 된 것 같지는 않다.


위패는 그 형태가 신주와 비슷하지만 제작법은 간단하다. 단순히 한 토막의 직육면체 나무를 다듬어서 그 위에 죽은 이의 친속과 관작 등을 쓴 것으로 약식 신주라고 할 수 있으며, 주로 불교 사찰에서 사용되고 있다. 위판이라고 하는 사판은 신주 형태의 넓적한 목판에 죽은 이의 관작이나 호 등을 쓴 것으로 성균관, 향교, 서운, 사우 등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다.


지방은 중국의 송나라 때부터 신주 대신에 일회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사당의 건립이나 우지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웬만한 사대부가 아니면 사당을 짓지 못해 신주를 모시지 못하고 그 대신 지방을 사용했다. 지방은 제사 직전에 만들었다가 제사를 마치면 소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제작이나 관리가 매우 간편하다. 제작은 신주의 모양과 같이 위쪽은 둥글게 하고 아래쪽은 평평하게 하며, 신주는 조상 내외분을 따로 만들지만 지방은 한 장에 내외분을 함께 쓴다.

 

사진이나 초상을 모실 때는 신주나 지방과 함께

이밖에 신위로 사용되는 것은 흙으로 만든 소상이나 동상, 초상화 등이 있었다. 소상은 중국에서 문묘의 공자 이하 성현들의 신위로 많이 사용되었고, 동상은 관왕묘 등에서 신위로 많이 사용되었다. 요즘에는 사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가정이 늘고 있는 바, 이러한 방법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사진이나 초상화는 신주나 지방처럼 제사를 위해 고안된 의물(儀物)이 아니고 경건하게 관리하기도 쉽지 않으며 제사 후에 소각할 수도 없는 만큼 제사의 신위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신주나 지방 옆에 함께 세워두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크게 우러나면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위가 바로 조상 자체는 아니다. 신위는 다만 조상이 깃든 표상에 불과하고 그 자체가 제사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다만 조상신이 있어서 거기에 임(臨)했기에 추모해서 마치 거기 계시듯이 정성을 쏟아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