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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반 상 식

생원.진사시

by "율문" 2019. 1. 20.
조선시대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국자감시(國子監試)와 승보시(陞補試)를 계승한 것으로, 진사시는 전자를, 생원시는 후자를 계승하여 성립된 제도이다.
생원·진사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어져 있었다. 생원시는 오경의(五經義)와 사서의(四書疑)의 제목으로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창작의 재능을 각각 시험하였다. 그리하여 합격자에게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일종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한 사람이 같은 해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양시(兩試)에 다 합격한 사람을 역시 양시라고 하였다. 생원·진사시에는 3년에 한차례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해 실시하는 증광별시(增廣別試)가 있었다.
이 시험에서 생원과 진사를 각각 100인씩 뽑고 이들에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따라서 합격자 중의 일부 극소수가 생원 또는 진사의 자격으로 관직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관리임용제와 직결되는 제도가 아니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관리임용제로서 출발한 문·무과(文武科)나 잡과(雜科)와는 그 성격이 기본적으로 달랐다.
생원·진사시와 문과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였다. 이것은 문과 응시자격에 관한 조선 초기부터의 규정이 문과는 생원 또는 진사 합격자로서 성균관에 입학해 일정 기간 (『경국대전』의 규정에서는 300일)의 수학을 마친 자만이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원·진사시를 문과의 예비시험제로 이해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생원·진사시는 문과와는 독립된 제도로서 존재했다. 따라서 그 시험도 문과의 일부가 아닌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
이와 같은 양자의 관계를 흔히 혼동해, 예컨대 “문과에는 대과와 소과가 있었고, 대과와 소과를 합해 문과라고도 하고 대과만을 문과라고도 하였다.”라든가, 또는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문과·무과·잡과가 있었고 …… 예비시험으로서 생원·진사시가 있었다.”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내용을 정확하게 정리한다면 “조선시대의 과거에는 문과·무과·잡과 및 생원·진사시가 있었는데, 그 중 문과나 무과 또는 이 양과를 합해 대과라고 했고, 생원·진사시를 소과라 하였다.”고 해야 한다.
생원·진사시 설치의 본래 목적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데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원 또는 진사로서 성균관에 입학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균관의 운영이 부실해 입학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문과 시험제도가 처음부터 원칙대로 운영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즉, 생원이나 진사로서 성균관에 들어가 300일 간의 수학을 마치지 않아도 얼마든지 문과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원이나 진사가 아닌, 즉 유학(幼學)으로 호칭되는 사람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예외적인 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다.
이리하여 생원·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문과에 진출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많아져 조선 말기 약 100년 간에는 문과급제자수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조선 초기 약 100년 간에는 그 비율이 15% 정도였다.).
따라서, 생원·진사시를 설치한 본래 의의는 후기에 내려오면서 거의 상실하였다. 그런데도 시험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종전보다 더 자주 실시했고, 뽑는 인원도 더욱더 많아졌다.
예컨대, 고종대에는 과거제가 완전히 철폐되는 1894년(고종 31)까지 모두 17회의 시험이 있었으며(증광별시가 6회나 있었다.), 이를 통해 생원 2,753인과 진사 4,275인을 합쳐 7,028인이 배출되었다. 특히, 1894년의 마지막 시험에서는 생원이 279인, 진사가 1,040인이나 되었다.
한편, 생원·진사시 응시자 중 후기로 갈수록 고령자가 많아 70 또는 80대의 노인도 적지 않았으며, 그 평균 연령이 문과 급제자보다 높았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관계 진출이나 또는 문과에 진출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응시한 것이 아니라,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지위 그 자체를 최종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생원이나 진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가문과 후손의 영예를 위해서도 절실한 소원이었다. 물론, 그들 중 관계 진출을 목적으로 다시 문과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으며, 후기로 갈수록 더욱더 그러하였다.
그들은 생원이나 진사가 관계(官界)와는 인연이 멀다는 사실에 더 큰 의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었다. 생원 또는 진사야말로 학자로서의 공인된 지위를 확보하는 동시에, 깨끗한 선비로서의 위신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었다.
생원·진사시가 국가 시험제도로서 본래의 의의를 거의 상실한 뒤에도 계속 실시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 풍조 탓이 컸다.
생원·진사시는 조선시대를 통해 모두 229회가 있었으며, 그 중 67회가 증광별시였다. 문·무과의 경우는 식년시와 증광별시 외 별시(別試)·정시(庭試)·춘당대시(春塘臺試)·알성시(謁聖試) 등 각종 임시특설의 시험이 있어, 그것이 모두 500여 회나 되었는데 생원·진사시는 위의 두 종류뿐이었다.
그리고 그 총인원은 생원 2만 4221인, 진사 2만 3776인을 합쳐 모두 4만 7997인이었다. 말기에 오면서 진사를 생원보다 더 많이 뽑았지만, 초기 약 60년 동안 몇 차례를 제외하고는 생원만을 뽑았기 때문에(생원시와 진사시를 정식으로 병설하기 시작한 것은 1453년부터이다.) 전기간의 총계에 있어 진사의 수가 오히려 적게 나타난 것이다.
생원·진사시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시는 한성(漢城)과 각 도에서, 그리고 2차 시험이자 최종 시험인 복시는 한성에서 실시하였다.
초시에는 정액(定額)이라 하여 한성 및 각 도별로 뽑게 될 인원수가 배정되어 있었다. 즉, 한성시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200인, 각 도별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는 생원·진사가 각각 경기도에 60인, 충청도에 90인, 전라도에 90인, 경상도에 100인, 강원도에 45인, 평안도에 45인, 황해도에 35인, 함경도에 35인씩 모두 1,400인이 배정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최종 시험에서 뽑을 인원의 7배의 수를 각 지역별로 안배, 과거제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지역 간의 불공평 내지 불균형을 억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복시의 최종 선발에는 그러한 지역 간의 균형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지역 간의 격차가 컸다. 예컨대, 서울 출신이 전체 합격자의 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생원시 합격자 중에는 지방 출신이, 그리고 진사시 합격자 중에는 서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후기에 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면서도 자신을 진사로 기록하고 또 그들을 진사로 호칭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원이라는 호칭 자체가 ‘김생원’이니 ‘박생원’이니 하는 식으로 속화되어갔는데, 아마도 진사시가 단순히 경서에 관한 지식만을 시험하는 생원시보다는 훨씬 어려웠다는 점과, 또 생원의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는 사실 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생원·진사시의 응시 자격은 기본적으로 문과와 동일하였다. 다만, 기성 관리의 응시를 가급적 억제한다는 정부 정책에 따라 문과에는 통훈대부 이하만이 응시할 수 있다고 한 것을 생원·진사시에서는 통덕랑 이하로 규정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생원이나 진사의 사회적 위신은 무과 출신자보다는 훨씬 높았다. 조선시대는 어느 가문이나 지역의 품격(品格)을 논할 때 반드시 그 가문 또는 지역에서 배출된 홍백패(紅白牌)의 수를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로 간주하였다.
그런데 그 홍패 속에 일반적으로 무과 홍패는 들어가지 않았다. 백패는 물론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수여하는 합격증이다. 조선 전체를 통해서 연평균 100인이 못 되는 이들의 사회적 위신은 오늘날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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