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 : 1974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61호로 지정된 화석정은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임진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수려한 경관에 위치해 있다. "화석정"은 율곡 선생이 국사의 여가와 퇴관 후에 찾아와서 작시, 연구, 묵상을 하였던 곳이다. 율곡 선생의 5대 조부, 강평공 이명신에 의해 세종 25년(1443년) 창건된 것을 성종 9년(1478년)에 선생의 증조부이신 이의석이 중수하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에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을 하던 이 정자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율곡이 자주 이곳 화석정에 들러 묵상을 할 때면 항상 기름걸레로 마루 바닥을 닦도록 시켰다고 한다. 율곡은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하고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0년전 유서를 남긴 율곡은 나라가 어려울 때 열어 보라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개성으로 도피하던 선조가 임진나루에 도착했으나, 칠흙같은 밤이기 때문에 건널 수가 없었다. 이때 율곡이 전한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 라는 유서대로 불을 지펴 임진나루 일대는 환해지고, 임금은 무사히 강을 건너 피신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소실되어 80년간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년)에 선생의 종증손들이 복원하였으나, 6.25동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하고, 1973년에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화석정이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임진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서 경관도 뛰어나다.
>>율곡 : 율곡의 성(姓)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珥), 자(字)는 숙헌(叔獻)이며, 호(號)는 율곡(栗谷)이다.본관은 덕수(德水) 이씨(李氏)로서, 아버지 이원수 공과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 셋째 아들로 1536년(중종 31) 12월 26일에 외가(外家)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라고 하였다.세 살 때부터 말과 글을 배운 율곡은 어느 날 외할머니가 석류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 같게?" 라고 묻자, "석류 껍질 속에 빨간 구슬이 부서져 있네(石榴皮과碎紅珠)"라고 대답하였다.
여섯 살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청진동)로 올라온 율곡은 따로 스승을 두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기본적인 학문을 배우고 나머지는 독학하였다.여덟 살 때는 본가인 파주에 들렀다가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가을의 정취를 '화석정'이란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으며, 열 살 때는 강릉 경포대에 들러 경포호수의 사계절을 표현한 '경포대부'라는 긴 글을 지었는데 그 문학적 재능과 학문의 깊이에 사람들이 놀랐다.열 세 살 때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시험관들에게 불러나가자 겸손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좋은 평판을 듣게 되었다.열 여섯 살 때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시묘가 끝난 열 아홉 살에 율곡은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다음해 스무 살에 하산하여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이 때 자신의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스물 두 살 때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고, 다음해 봄에 당시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을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찾아가 궁금한 점들을 묻고 답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며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크게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 해 겨울에 별시라는 과거시험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는데, 시험답안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이 때부터 스물 아홉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 일컬어졌다.
스물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 이원수공이 돌아가시자 삼년상을 치렀다.
스물 아홉 살 때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 해의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첫 관직으로 호조좌랑에 임명되고 이후 예조좌랑 · 이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서른 세 살 때는 사신의 일행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서른 네 살 때에 자신의 정치철학을 담은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서른 아홉에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국가적 재난에 대한 대책으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으며, 마흔 살 때에는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하였다.
마흔 한 살 때에 정계를 떠나 해주 석담에 내려가 청계당(聽溪堂)을 짓고 생활하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시대에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마흔 여섯에 다시 정계로 돌아와 대사헌을 거쳐 호조판서, 대제학으로 승진되었고 또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마흔 일곱 살 때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었으며, 이 해 말에 병조판서의 중책을 맡았다.
마흔 여덟에 병조판서의 직분으로 시국에 대한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으며,이어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힘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이므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십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그 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고 스스로 후회하였다고 한다. 마흔 아홉 살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었으며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