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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경주김씨~ 안동김씨 ~ 수성최씨

by "율문" 2021. 11. 30.

『보감』에 의하면 안동김씨의 시조라고 말하여지는 ‘숙승’은 경순왕의 넷째아들인 대안군(大安君) 은열의 셋째아들이다. 여기서 ‘대안군’이라는 것이 어디를 봉지로 가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숙승의 벼슬은 공부시랑에 이른다고 한다.

‘숙승’의 아들인 ‘일긍’은 금자광록대부 상서 우복사 삼한공신 태사 대광(金紫光錄大夫 尙書 右僕射 三韓功臣 太師 大匡)을 지낸다.
‘일긍’의 아들인 ‘이청’은 상락군 안동태수를 지낸다. 아마도 이때부터 이들 일문이 본격적으로 안동에 세거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청’의 아들은 예부시랑을 지낸 ‘의화’이고, ‘의화’의 아들은 문과 한림 직사관(文科 翰林 直史館)을 지낸 ‘민성’이며, ‘민성’의 아들은 이 가문의 중시조가 되는 김방경의 아버지 ‘효인’이다.

김효인은 고려 희종(熙宗) 4년(120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는 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지제고(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知制誥) 벼슬을 지냈고, 나중에 금자광록대부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수문전 태학사 판리 병부어사대사중서령(金紫光錄大夫 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 修文殿 太學士 判吏 兵部御使台事中書令) 벼슬을 추증받았다. 그는 예서에 능하였다고 하며, 고려 고종 시대, 그러니까 서기 1253년에 타계한다.

이 김효인은 방경, 지경(之慶), 현경(玄慶) 등 세명의 아들을 두었다. 현경은 충순공(忠順公)으 아들 준 그의 아들 영규(永奎)는 수성최씨(隋城崔氏)의 시조가 된다. 지경은 부사공(副使公)이고, 방경은 충렬공(忠烈公)이다. 충렬공 방경의 후손들은 21개 파로 나뉘어 복잡할 정도로 전개되어 나간다.

 

충렬공 김방경

충렬공 김방경은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안동김씨, 즉 상락김씨의 중시조이다. 사실 안동김씨는 이 충렬공 김방경의 후손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동김씨의 역사 속에서 김방경이 지니고 있는 위상은 높은 것이라고 하겠다.

‘삼소재’의 방문에서도 그것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삼소재’의 대청마루는 직사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직사각형의 한쪽 끝은 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사랑방은 대청마루의 대문쪽 한 끝에 뒤쪽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대청마루는 사랑방의 앞쪽에서는 좁은 쪽마루 형상을 띄고 있고, 사랑방 옆쪽으로는 통으로 마루가 깔려 있었다. 통으로 마루가 깔려 있는 부분은 앞쪽이 터져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다 벽으로 막혀 있었다.

그 사랑방 앞쪽의 쪽마루 측면의 벽, 그러니까 대문쪽 벽에는 작지 않은 액자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액자의 위쪽에는 종이가 주렴처럼 드리워져 액자의 윗부분 3분의 2 정도를 가리고 있었다. 한 눈에도 그것이 이 집 주인에게 심상치 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충렬공 김방경의 영정이었다.

액자에 넣어진 종이그림의 위쪽에는 ‘안동김씨 중시조 휘 방경 존영’(安東金氏 中始祖 諱 方慶 尊影)이라는 글자가 씌여져 있었다. 그 밑으로 옷을 달리하는 충렬공 김방경의 영정이 나란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할 때 좌측에는 무복을 입은 충렬공 김방경의 모습이고, 우측은 문복을 입은 충렬공 김방경의 모습이었다. 그 두 개의 그림 아래 쪽에는 충렬공 김방경의 행장이 길게 씌여져 있었다. 그러니까 액자 앞을 덮고 있는 종이주렴은 액자의 그림을 보이지 않게 하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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