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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호남 문중

by "율문" 2012. 4. 5.

 

汎京湖宗統連系大同合譜撰修重要資料와 經過宗報

올해는 예년과 달라 극심한 무더위 속에도 불구하고 문중 대소제절께서는 여전하오신지 알고자 문안 드리나니 아울러 하시는 사업에 더욱 번창하심과 많은 발전이 있으시기 千萬바라나이다.

過般 幾年前 우리 호남의 어긋난 上系 宗統을 三百有余年만에 기적적으로 밝혀 考證經緯誌와 함께 奉審한 바 있었음은 주지한 사실이거니와 賜姓始祖이신 隋城伯 永奎, 諡 文惠公과 호남의 洛南始祖이신 世朝祖敎差官知製敎 淳의 진정한 宗統으로 연계를 지음에 있어 세기적 撰修世譜를 발간하는 중책을 맡아 이미 착수중에 있음을 알려 드리며 추진하는 과정에서 약간 문제점에 부딪혀 가소로운 鷄卵論爭이 오니 문종중 일반 宗賢의 공론에 붙여 앞으로 우리 종회 운영에 일대 활성화와 새출발 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여 책임 監修하는 입장에서 기탄없이 發議하오니 宗門長, 族丈, 宗親重鎭 그리고 학식경험 있으신 宗賢의 귀중한 의견을 모아 만장일치로 납득한 가운데서 결단을 내리고자 하오니 널리 考察하여 주십시오.

어디! 우리 호남 자손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멀쩡한 隋城伯 賜姓 崔氏니라─ 그런데 왜 우리 湖南의 上系宗統만이 본래 水原崔氏五世孫 [倡]부터 十世孫 [居涇]까지 六位靈魂이 똑같이 누가 보든 一卵性祖上이어라 ─ 괴상하기 짝이 없어─ 他姓 萬姓譜에도 찾아볼 수 없느니라 ─ 비웃고 보는 族譜 愛好家, 族譜出版社, 傳統文學家, 史學家, 漢學者, 他姓宗會責任有識者, 귀한 양님딸을 보내 옥동자녀들이 들석들석한 우리 외척들이 아마 방방곡곡 전국에서 지금도 웃음 비웃음이 내 귀에 통곡소리 처럼 들려오네 그려 ─.

우리는 뚜렷한 賜姓한 隋城崔氏일진데 왜 本來 水原崔氏 門中과 우새스럽게 [네 조상이냐!]니 [내 조상이지!]라 하고 다투고 싸워야 할 것인가! 장난이 아닌 참말이라구 ─ 어리석어 ─ 乳臭해라. 생각해 보면 교통 통신이 미급한 묵은 시대였느니라. 오리무중에서 헤매이고, 당나귀 타고 시행착오한 우리 호남의 그릇된 宗統世譜(歷代世譜原本이 된 重修草譜丁亥1707編)임을 初心으로 認識하여 하루빨리 바로잡아 본래 水原崔氏 五世부터 十世까지의 六位靈魂을 本來 水原崔氏 門中으로 鄭重하게 모셔 보내드리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진데 [愚者는 多辯 함이니라] 因爲 古人 炳商 族兄 說을 되풀이하여 本來 水原崔氏 六位靈魂 中 十世인 [居涇] 一位 만 남겨 隋城崔氏祖上(洛南始祖 中直大夫 淳의 先考로)으로 모시자고 [白鷗가 까마귀 깐 소리]를 지르니라 ─ 어찌하랴 ─ 우리 조상께서 뭐라 하실까?─양반도 三班도 하신 우리 호남의 貴公子孫들이여!  벼락을 줄만한 말도 아닌 말썽이여라 ─ 왜! [居涇]을 싸잡고 말썽이 있느냐 하면 舊 碑文에 [居涇]이 새겨져 있었다고 억지를 부리는데─ 舊 碑文이라면 洛南始祖 淳의 初體碑(1489立)를 말함이니라.

헌데 初體碑는 내가 發掘 奉審하였는데 他姓 [居涇]名單이 있을 리 萬無하고 다만 洛南 五世宗孫 羊巖公 衡께서 [丁亥 重修草議](1707)하면서 [本貫水原으로 錯覺하여 本來 水原崔氏 孝肅公 婁伯宗中 譜冊에서 七世孫 [有春]을 우리 湖南의 시조라 하신 [有椿]으로 알고 우리 家廟立議의 [八世未祥]이란 空白에 代數를 맞춰 本來 水原崔氏五世孫[倡]부터 十世孫 本[居涇])까지 이어 洛南始祖 淳을 八世라 새겨 改碑한 碑文이니 羊巖公이 作文한 碑銘을 말함이니라.

우리가 숭고한 조상을 모시는 자손이니 만치 또다시 [白鷗가 까마귀 깐 소리]를 한 자손이 생기거든 호남에서 벽장 속에 깊이 든 곰팡이 낀 誌狀錄을 뒤져보고 똑똑히 보라 하겠노라. 하여라.  즉 初體碑라면 五百五年前에 淸明立한 偶然이 아닌 先瑩의 가르침으로 再三發掘함에 이르러 審視하였으니 바로내가 唯一한 산 증인이라 할 것이니라.

우리 호남(湖南)의 뿌리이신 中直大夫 敎 淳께서 조상에 대한 말씀을 전혀 안하시고 別世(1485卒)하셨으니 先考祖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손들 신상에 무슨 害가 될까 싶어 오히려 철두철미 숨기고 감추고 계셨던 깊은 心情이야 누가 모르겠는가.─ 아주 어려서 政變慘禍로 피난오신 처지라 해서 能히 실필 수 있으리라 하겠노라.

연이나 우리 宗統이야 두말할 것 없이 白陽도 같아 千年歷史를 가진 新羅敬順王(入麗承正院)과 비 樂浪公主:王建의 女의 十一世孫으로서 崇祿大夫 麗朝典書兼 寶文閣大卿 慶州金氏 永奎께서 水州 一帶가 괘亂, 民心이 殺伐하여 禽獸와 같이 함을 근심하신 왕을 도우고저 자청하여 同心 安說장군을 副使로 出 治水州하시니 일년도 못되어 孝悌之鄕으로 回歸,善治하신 功德이 컸음으로 忠烈王께서 [太祖를 弓裔의 謨殺에서 救出하신 崔 魏와 같도다]하시어 封 隋城伯 賜姓 崔氏하셨니라(1302년)   向後 湖南 按撫使로 계셨다가 急患으로 因하여 교자로 미어 退歸하시고 藥效없이 逝去(1312)하시니 水州民 慕 設祭하시고 諡號를 文惠라 내리셨니라.

 (註)口傳 [경주김씨하고는 혼인을 못한단다.] 云

世祖朝에 이르러 隋城伯 賜姓(1302) 始祖 以來 百五十有余年만에 비로소 六世宗孫이신 行列 諱 有臨, 冠而字 子昻께서 隋城君으로 冊封받으셨고 諡 安襄公이신데 先考이신 涇 자께서도 閑職하시다 世祖朝에 역시 司正 登官하시고 追封 隋城君으로 계셨고 諡 安襄公이시니라.또 從姪이신 諱 옥字 府使公께서도 世祖朝에 登官하셨고, 行列 諱 [有]자 有憲이신데 行列字를 피하시고 世譜에도 없어 옥자로 改諱하신 경우를 살필 수 있어 하느니라. 역시 우리 湖南에서 우리 始祖라 하신 [有椿]은 隋城伯文惠公의 六世孫 [有字 行列]으로서 어려서 侍女등에 업혀 洛南하신 始祖라면 中直大夫 敎 淳이시니 보단속 家乘에 써보낸 行列字 [有椿]인 것이며, 冠而字는 동일한 [子泳]이시니라.

한편으로 不遇하셨던 조상의 시대를 麗朝로 돌려보면 명나라(明國)가 北元을 치며 강대해 가는 麗末에 鳳巖先生 元凱께서 司憲府 判付事兼平章事를 辭任 長湍 鳳巖으로 退歸하시고 龜林선생 文凱께서도 宗簿寺令을 不仕 作故하시고 長子 善은 漢城少尹을 不仕 失傳하셨으며 鳳巖先生 次子 箴께서도 南京留守를 不仕, 가족과 失德 不傳하였음은 政變慘禍로 봉변하여 辛苦하신 경우를 감히 살필 수 있으리라 하노라.

그리하여 三,四, 五世까지는 隱居 閑職하셨다 겨우 六세에 이르러 檢校公 義 祖上의 사위(女壻)이신 鈴平君의 因緣으로 말미암아 우리 賜姓한 隋城崔氏 面目을 一新하는 契機가 되었던 것입니다.

(註)口傳 [신선산이 울면 천둥이 일어나고 난리가 난다.]라 云

여기는 신선산 신선묘라 일컬어 순수한 동리 사람들에 대대로 내려온 傳說인지라 踏査 奉審한 바, 湖南의 上系祖上으로 判明하여 官爵이 檢校參議에서 檢校戶曹參判으로 官至檢校太子詹事를 지내신 崔義와 貞夫人昌原黃氏, 그리고 階下에 嗣子 知知安山郡事 水山의 陵墓로서 鈴平君 尹士균 을 筆頭로 훌륭하게 造耕하여 壯大한 文人石과 함께 鄕面은 官里山 二三 庚坐之原에 甲向으로 모셔 있느니라.

(註)口傳 [신선산에서 절을 하면 병이 낳는다.]라 云

湖南으로 營將宅을 찾아 피난 成立하신 淳께서도 敬差官 知製敎에 오르셨고 世祖薨去(1468.9월)하심으로 인하여 致仕退歸하셔 향년69세(1485년卒 1489 淸明立 碑)로서 별세하셨으니 진실로 하나요, 태어난 뿌리도 하나일 뿐 둘도 없어라 함이니라.

(註)口傳 [신선산에서 삼현 육각이 잽히면 남선자손들에 경사난다더라.]라 云.[호남에서 자손이 벼슬을 하면 신선산에서 삼현육각이 잽힌다.]라 云. [밤에 신선산에 삼현육각이 잽히면 무서워서 밖에 못나갔다더라.]라 云

동리 사람들의 口承傳인데 어찌 그렇게도 엇그제처럼 생생하고 쌕쌕한지오.─ 奉德한 자손으로서 아아 신의 귀뜸이라 아니할 수 밖에 ─감격에 넘쳐 ─ 꿈이냐! 생시냐! 年久歲深 잃어버린 영원한 조상을 奉審하고 진정으로 엄숙하게 모셔야 할 자손으로서의 도리를 명심하며 숭고한 조상의 諡 行蹟을 바로잡아 세기적 撰修世譜를 발간하여 타성족보에 뒤지지 않게 一家一族 汎 京湖 大同合譜함으로써 우리 隋城崔氏 面目을 一新토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就而 湖南의 뿌리이신 洛南 始祖 中直大夫敎 淳의 숨어있는 行狀을 簡略해서 풀이하면,

우리 湖南의 世譜가 丁亥年(1707)에 重修草譜(羊巖公衡자 編)한 것이 重修가 아닌 失修로 重錯誤한 어글어진 譜冊이어서 本來 水原崔氏와 混同한 根源이 되었던 것입니다.  口承傳에 피난 온 갓난 애기로서 받아 양육하신 영장 아짐이신 洪씨 할머니께서 일가집 가정 형편이며 家乘에 적혀있던, 卽 [麗朝이니, 官至이니, 檢校니, 太子詹事니, 有椿이니, 子泳이니, 永樂이니, 丁酉니]하여 못할 말씀도 있었으리니 記憶을 더듬어 말씀한 것이니라. 또 果川을 어려서 종 등에 업혀 떠나오셨다든지,─金氏에서 賜姓한 崔氏이니라. 경순왕 자손으로서 경주김씨하고는 혼인을 해서는 안된다던가, 本은 水城인데, 지금은 水原을 말한다든가 하시고, 증손녀이신 淑人固城李氏(洛南始祖 淳의 配位)에게 이야기처럼 말씀하신 洛南行蹟이 孫 子女들을 걸쳐 전해온 순수한 口承傳일진데 洛南五世 武肅公 希亮께서 적어놓은 譜文이 전혀 없어서 집안에 전해내려온 말도 소위 [水城(隋城)崔氏 家廟立議(1648.2월)에 기술하면서(구두로 말씀하신 것을 필기) 다소 先後가 뒤바뀌고 좌우로 흔들리기도 하였으리라 한 時代 考證도 하여 현대인 자손의 咸覺으로 英斷을 하여야 할 것이며 譯本해 주기 바라노라.

─(主要提言)─

(註)口傳 [갓난애기 때 종 등에 업혀 피난 오셨단다.]라 云

또 계속해서, 洛南始祖이신 淳의 숨어있는 行蹟을 率直하게 말씀드림으로써 우리 湖南의 진정한 宗統을 連系지을 수 있으리라. 하므로 不肖 내가 일개 族丈으로서 未祥하고 歪曲되어 있는 우리 湖南의 上系宗統을, 口承傳을 등불삼아 古文譜牒을 더듬어 奉審踏査 함으로써 해명한 바 있어, 즉, 政變慘禍로 果川 等地에 隱居 避身中으로 계신 先祖考(檢校公義昻水山內外)께서 갓난애기(淳 1417생) 만이라도 살려야 하겠다 싶어 시녀 등에 업혀 山처럼 편안하고 바위(岳)처럼 굳건하라 하여 편지문권[家乘]을 보단 속 깊이 감춰주며 湖南營將 찾아가거라. 가서 아짐을 만나라 하셨으니 종은 애기를 [내아가 산악아]라 부르며 신분을 감추려고 무당 노릇도 걸식도 하며 全州 完營으로 찾아 營將 交代所가 있는 여산으로 영장아짐댁(營將아짐宅) 대문앞에 왔다갔다 허술한 차림인지라 ─미친여인이라 해서 수차 쫒겨났다 겨우 편지를 내보여 신분을 알아 영장(營將)아짐[ 觀察使를 歷任하신 容軒公 左議政 李原] 內室이신 洪氏[(南陽洪氏 唐洪 中郞公 潛女 = 檢校公 義의 丈母와 從姉妹간)] 할머니께서 받아들여 淳이라 命名하여 養育하시와 成立하시니, 洪氏할머니 曾孫女 出生하여 結緣시켜 淳 (男子 二十세)에 家乘에 써 보낸 冠而字 子泳으로 慶事를 추리시고 어린 曾孫女[淑人固城李氏]의 성장함을 기다리셨다 성혼하셨으니, 당시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늦장가(長子 貴淙 1480 進士,─次子 귀당 1476 武科, 伯妻男 伯安 1428생, 丈人 節 1411생이니, 사위이신 淳은 1417생이라, 즉 7세 사이라 해서)드신 처지를 능히 알아볼 수 있느니라.

(註)口傳 [장모따라 羅州로 오셨단다.]라 云

[妻家따라]도 ?한데 일부러 丈母라 함은 당시 丈祖母라 하셨는데 오백년이 지나간 오늘날 丈母로 변화한 발언이어라(1417 淳生, 洛南 1450년), 丈祖母란 양육하신 洪氏할머니, 장인 李節:현감, 장모 여산宋氏[장인 李節께서는 祖父이신 좌의정 容軒公 李原[1426년에 數 많다 한 夫人問題로 司憲府에 告訴한 자가 있어 左議政을 剝職하고 鐵城府院君, 佐命功臣 四等의 祿權을 박탈 당한 후의 正, 本, 內室, 繼, 妾 그리고 宗, 嗣, 庶子사이에 잡안의 복잡한 알륵이 있음]를 따라서 洪氏할머니 택에서 作故하신 容軒公 李原의 墳墓를 쌓고 移葬禮의 대립 등 현감을 致仕, 伯伊[長水 長溪縣, 현 溪內 溪北 溪南의 삼면, 고성李씨 세보에는 伯仍으로 되었음]를 退去(1450)하시니 장모라 할까 장조모(洪씨할머니)님 따라 妻家 丈人 丈母와 함께 나주 草洞으로 始居하셨으니 羅州 草洞은 瀋溪와 더불어 固城李氏 菟喪地일 것이며 사위이신 淳의 우리 隋城崔氏 湖南의 토상지이기도 하느니라.

余談으로 一退居 하신 伯伊의 [伯]과 縣監 장남이신 伯安公의 [伯]字가 동일함과 長溪縣의 [溪]와 始居하신 羅州 草洞 瀋溪의 [溪]가 동일함은 우연이 아니라고 推理하노라.

헌데 우리 隋城崔氏 湖南의 世系를 전국 출판사에서 발간한 족보에 의하면 어떤 분파도 [居涇]系라 되어 있어 "絶句" 언제─누구가 ─우리 賜姓한 隋城崔氏 湖南의 子孫을 本來 水原崔氏 十世 [居涇] 子孫으로 둔갑시켰을까?   천벌을 줄만한 못된 것을 돈받고 안받고 간에 출판사나 水原崔氏門中으로 건네 준 어두운 邪學子孫은 누구인고!! 他姓 靈魂을 붙잡아 놓고 禍가 우리 門中 子孫들에 번지지 않도록 풀붙여 금줄치고 물꼬를 단단히 막아내려야 하겠구나 그려 ─

[길은 물어서 가렸다]하겠노라.[모르면서도 아는체한 눈치로 꽈오?]라 하지 말게나 ─까마귀소리 [꽈오?]란 바로 過誤라니까 그려! 아아! 洛南始祖 이신 中直大夫 敎 淳의 初體碑(1489立)를 三次나 거듭 改碑하여 湖南 行列로 [炳]자가 淳(17세손)이라 새겨놓은 漢學子孫은 누군가! 내가 設竪한 長明燈에 [十八世孫 炳完]이라 한 刻字를 [十七世]로 고쳐야 한다고 우기고 악착을 부린 불손한 자손은 누구여! 祖上 歲祭에 모인 門宗人 앞에 [十八世 炳完]은 틀렸고 [十七世]라 떠들어 댄 천박한 子孫은 또 누구며 ─ 또 隋城伯文惠始祖 三世孫子로서 三士 直諫派(士廉, 士衡, 士威는 從兄弟)로 知名하신 李朝 三政丞을 낳은 鳳巖先生[初諱 金氏 士, 開諱 隋城崔氏 元凱 崔兼 文武]는 훌륭한 우리 祖上인지라 ─ 알아보지도 않고 탐진 최씨에서 따온 [崔士威]아니냐고 중상 모욕한 못된 傍孫은 어디있어! 어디보자 宗親會야!! 네 體質이 그래서야 되겠느냐! 뭘 하는고 ─宗親會事務所도 갖추고, 酒饌은 맡겨두고 山寺도 硏修도 斷食도 發想도 新時代에 알맞게 轉換해서 崇祖愛族하며 자녀들의 祖上에 대한 올바른 認識, 그리고 子弟들의 사회진출에 이바지할 수 있는 宗親會를 文民時代에 알맞은 運營으로 좀 더 活性化 시켜서 새 출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으로 思惟하는 바이노라. 따라서 내가 匡師도 講師도 되야 하겠소이다.

열거하자면 한정이 없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先代祖上께서는 교통 통신이 未及한 시대였니라. 우리 上系字統이 호남에서 무려 삼백년이고 바로잡지 못하고 호랑이 담배먹고 딴판으로 단순한 文字學譜선생님들을 원망해 뭣하리ㅡ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ㅡ 현 정보화 시대에 낳은 자손들이 나서서 머리 맞대고 눈도 맞추고 입씨름도 대화도 해서 의리도 우애도 있게 한 뿌리 한 심혈로 다 맞춰봐야 하지 않겠소이까.─봉창을 터라! 문턱을 넘어 보자! 한 걸음 더 밖으로 나아가 仁者樂山 知者樂水하고, 산 넘어 물 건너 宗會에 나가 소리쳐 징치고 활성화 하여 떡 먹고 고기 잡으러 나가봅시다.

그려! 우리 족보가 나오면 외면하지 맙시다.우리 조상께서 나라도 위하고 크게 벼슬도 하셔 공신도 정승도 신선도 스승도 계셨으니 憂國 士林할 것 없이 억울하게 몰리고 귀양가고 은신, 녹권박탈, 사사하신 조상도 어느 성씨를 막론하고 다 계셨을텐데 집안에 흠이 생겼다 하여 고의로 은폐하고 삭제하여 正誤가 뒤바뀐 채 이지만 맞춰 펴낸 족보가 태반인지라 萬姓 大同小異하느니라.

허나 우리 賜姓하신 始祖도, 어려서 洛南하신 우리 湖南始祖도 諡 狀도 行狀도 行跡도 잘 몰라서야, ─代數도 몰라 또 代數는 커녕 우리 湖南의 宗統 말이라면 기가막혀 하느니라.

이조에 와서 隋城을 갈아 없애고 水原이라 地名했기로 本來水原崔氏와 賜姓崔氏 湖南이 어쩐지 分揀을 못하고 두 崔氏 上系 六位靈魂이 똑같어, ─ 허허! 어이없어 ─ 쌍둥이 祖上인가보다. 어리둥절 말이 막혔어라. 남 앞에 族譜도 祖上도 내보이지도 자랑도 못하고 감춰야 할 지경이니 ─ 어매! 기가 죽어간다. 수치스러워라. 지게도 못지고 활개도 제대로 못피어 비우도 없어라 하니 머리가 빙빙돌아 뒷짐만 지고 물러가야 할 世子孫들이 안타까워라 하겠노라.

여봐라 !족보야 !어서 오너라 !우리 隋城崔門의 거룩하신 祖上의 별도 많고 총총하여 빛나는 훌륭한 功業績을 賢明한 우리 子孫들에 서슴없이 垂簾해 주소서.

엉클어진 실오라기처럼 宗統의 端緖를 잡지 못해 오리무중에서 방황하는 우리 湖南의 뜻있는 子孫들이여 ! 주책없이 우물쭈물 거리고만 있지 말고 엉클어진 수수께끼 풀어낸 장본인 내따라 바라하다 싶이 대담하게 우리- 우리 隋城崔氏大同撰修世譜 묶어보세.

그리하여 거듭 재창하거니와 汎京湖 大宗會 次元으로 즉 [隋城崔氏大宗財團]도 創設하여 向學 留學 子弟들의 재정 지원과 사회진출 하는 善良子弟들을 聲援도 하고 金援도 해서 門宗中의 인재 배출에 이바지 하고저 提起하여 마지 않겠노라.

所謂 留守公派이신 湖南 五派子孫에게 原호에게 호소합니다

일일이 尋訪하여 뵙고 무릅을 맞대고 주찬으로 의견을 나누고저 하오나 우선 서면을 통해 말씀드리고저합니다.

前述한 바와 같이 우리 湖南에서 그릇된 宗統을 갈팡질팡 하고만 있었기에 留守公派로 連系하신 선대에서 [이대로 가서는 水原崔哥가 되어버리겠다]하시어 連系지어 명실공히 隋城崔氏로 爲先盡誠하신 愛族정신에 경의를 표하면서 내 일개 족장으로서 우리 湖南子孫들에게 기리 團合하여 世紀的 우리 撰修世譜를 發刊하는데 빠짐없이 參與해 주실 것을 千萬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따라서 정통(正統)으로 연계(連系)지어 주시는데 있어 [본래 수원최씨(本來 水原崔氏)] 10세손(十世孫) [거경(居涇)]을 우리 수성최씨조상(隋城崔氏祖上)으로 초휘(初諱)니 개휘(改諱)니 아호(雅號)이다 한 종통연계(宗統連系)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前述 前後 本書를 다시한번 檢索考察하여 주시고 우리 湖南의 眞正한 上系宗統連系에 대하여 湖南五派 總意로 하여 현명한 栽量이 있으시기를 갈망하면서 이만 그치겠습니다. 余不備上.

追文

大韓甲戌 秋收滿月에 於 日本東京     湖南綾州出身 癸亥生      成馬亭     崔炳完       謹書     

별첨#

1. 호남 5파 守親에게 드리는 余談附記

2. 踏査奉審하여 發掘한 碑石에 對하여

3. 近內 외척에게 보내는 서신

※ 아래 追加된 내용은 생략하였습니다.

●  隋城崔氏 炳完 內歷과 系出 祖上의 行狀

●  [十五句二十節詩望鄕

●  隋城崔氏 洛南五四四周年歲祭祀

●  隋城崔氏汎京湖世譜撰修奉審表

圖表 : 賜姓始祖 = 洛南始祖世系表는 여기와 동일하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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