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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城 崔氏(수성최씨)

수성최씨 호남 문중2편

by "율문" 2012. 4. 5.

 

髓城崔氏 湖南宗統連系誌

髓城崔氏湖南武肅公派綾菴系 崔 炳完 著

前  述  序

鼻祖 敬順王의 11世孫으로 貫鄕이 慶州金氏이며 벼슬은 寶文閣大卿이시다.
  諱 永奎는 高麗25代忠烈王28年 (1302)에 御命을 받어 副使 安說을 帶同하고 水州 民亂을 平定하여 治政하시니 忠烈王께서 嘉祥이 여겨 말하기를 [餘王을 도와 살려줌과 다름없는 處事니라] 하시면서, 隋城伯으로 冊封함과 同時 [高麗太祖를 後高句麗王 弓裔로 부터 謨殺에서 救出한 崔巍와 같도다]하시고 崔氏)로 賜姓하셨다.
  以後 벼슬이 崇祿大夫 刑曹典書 湖南按撫使를 하시고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諡號를 文惠公이라 내리시고 德望이 높아 水州之 民慕로 設祭하셨다. 如斯한 故로 우리 湖南子孫의 뿌리를 뻗친 根源이 되는 文惠始祖의 湖南按撫使로 계셨던 것이 愚然이 아닌 天心이 아니였던가. 호남의 洛南始祖의 口傳에 [侍襁負南下]라 하셨는데 湖南 4世孫으로 諱가 樂窮이신 즉, [承旨公三歲俱失帖]하였기 [家乘文券因而不傳]이라. 하셨거늘 湖南子孫의 系出이 失德된지 悠久한 歲月이 흘러간 오늘날 湖南子孫系出究明함은 우리 子孫의 責務自覺하여 우리나라 民主化와 民族統一의 氣雲과 함께 그야말로 百家爭鳴하고 百花齊放하여 發想의 轉換으로 우리 [湖南의 隋城崔氏] 子孫에 있어서도 國家潮流에 따르는 방향으로 隋城伯 文惠始祖의 緣故地인 경기 수원을 爲始로 各 宗派와 방방곡곡의 문중인과도 一家一族 連系지어 宗統 大同合譜함으로써 [戊辰年 中修世譜]를 새로 발간하여 後世에 남겨놓을 것을 千萬 念願하노라.
  따라서 崇祖愛族精神을 昻陽함으로서 一大 宗中事業으로 하여 內外로 우리 隋城崔氏의 面目을 一新하여 子孫萬代에 榮光을 일으도록 하느니라.

隋 城 崔 氏   湖 南 武 肅 公 派 綾 菴 系   
現日本在留 紅陵(拓殖)大學卒(株)三陽企劃代表 取締役   
成馬   崔  炳  完  書  (癸亥生) 戊辰年  霜月   

 

1. [諱가 有椿으로 우리 始祖이시다]에 대하여
   湖南五世孫 資憲大夫 兵曹判書 武肅公께서 仁祖 26년(1648)2월16일 內外戚 臨席下에 [隋城崔氏家廟立議]에서 記述한 것이다.
  그러나 [慶州金氏安東系出]로 부터[賜姓)]하신 [隋城伯文惠始祖]가 아니라 [有椿]은 우리 湖南의 始祖]라 하신 것이 明白한 事實이다.  또 [中直大夫 淳 도 계셔]라 하셨는데(注#1) 이는 우리[始祖가 有椿으로 淳도 계셨다]는 뜻이니 [우리 湖南始祖라 하신 有椿]의 記錄에 [侍襁負南下]라 하였고 承旨公三歲俱失帖하니 [家乘文券因而不傳]이라는 記述과 [湖南一世祖]의 口傳에 [갓난애기 때 [종] 등에 업혀 避難오셨다]는 것이 [異口同聲]이므로 所謂 洛南始祖는 한분일지니 [有椿)]도 淳도 같은 洛南始祖일 것이요,  즉 [有椿은 襁褓에 싸여 侍女 등에 업혀 南下]하신 [初諱가 有椿]이시고 [淳]도 亦是 [어린 아기로서 [종] 등에 업혀 湖南으로 避難]해오신 후로 [改諱 淳]하신 것이고 字를 [子泳]이라 하신 것이다.
  (註) 前記한 [承旨公三歲俱失帖]이란 어머니 金氏가 承旨公을 出生하신 後 34일만에 남편을 여의고 小大검 이며 葬事지내고  三虞祭와 小大祥을 한결같이 禮法에 따라 모시고 服이 끝나는 그날부터  金氏는 飮食을 끊으시어 5일만에 돌아가시니 오직 어린아이 하나만 남게되어 婢僕과 姑母 姨母사이에 기르시다 六歲 때에는 姑母夫께서 養育하셨다. 따라서 承旨公 三歲에 兩親을 모두 잃은 해에 家乘文券을 遺失했다는 記述이다.   (戊辰年霜月에 成馬 炳完書)

 2. [避難해 오셨단다]에 對하여
  [文券을 보단속에 감춰]주시고 [湖南營將 찾아가거라]하시어 [종]은 [乞食으로 巫堂 行勢]를 하면서 身分을 감추고  湖南으로 營將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大門앞까지 가서 왔다 갔다 하다 [營將아짐을 만나겠다]해도 異狀히 여겨 몇번이나  쫓겨나다가 겨우 사람을 通해 남모르게 어두운 밤을 타서 營將아짐을 만나게 되여 편지를 내보이고 [아이를 살려달라]는 것이였다 한다.
  所謂 편지란 [承旨公 三歲 俱失帖)]한 家乘文券일 것이니 洛南始祖의 出生은 [永樂丁酉]요 諱는 [有椿]이라. 곧 太祖17年(1417) 麗朝 滅亡, 李太祖 立國 後 二十五年이다.
   隋城伯 文惠始祖의 曾孫인 嘉善大夫 檢校 戶曹參判公 口說에 [外戚)인 王妃事件으로 몰려 避難해 간 후 모르게 되어 子孫이끊어진 것이다]하며 隋城伯文惠始祖의 子孫으로서는 檢校戶曹參判公 義 以外에는 政變慘禍로 몰려 [避難]해 갔다는 祖上은 찾아볼수 없다.
(註)  1. 隋城伯文惠始祖의 曾孫이신 檢校戶曹參判公 義의 [檢校官爵]은 功臣에게만 주는 벼슬로서 麗末 重鎭으로 侍中 [李仁任][安師琦][崔瑩]의 뜻을 받아 恭愍王23年[1374] 5月에 明使臣 傳送官으로 任命받아 鴨綠江 건너 遼東 開州站에 到着한 後 11月에 傲慢無禮한 明使臣 蔡斌을 天註에 處하고 數千의 馬匹과 貢物部下와 함께 北元으로 들어갔다.  禑王 7年(1381)에는 門下侍中 [李仁任]과 [崔瑩] 將軍의 庇護 下에 歸國하시여 功臣으로 推戴받아 嘉善大夫 檢校 戶曹參判으로 계시다 [明나라가 勢力이 宗主國으로 强大]해지자 [明使臣 蔡斌事件]으로 追究받게 되자 太宗16年(1416) 6月에 廢官 當하시고 [安山, 果川] 等地로 避身 中에 長子인 水山의 配이신 善山金氏(永倫의 女)께서 出産한 바 있어 避身의 몸인지라 [갓난애기만이라도 살리려고 애기어머니 金氏와 형제분이신 營將]이 계신 湖南으로 侍女 등에 업혀 보낸 것이다.  湖南 一世祖 淳의 出生은 永樂 丁酉이고 水山公은 天順六年, 世朝八年[1462] 10月에 先考(義)墓碑碣의 陰記에 知安山郡事의 벼슬로 살아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註)  2.  湖南一世祖 淳의 出生이 太宗17年(1417)인데 그 다음해인 1418년 6월에 王世子 제를 廢하고 忠寧大君을  王世子로 내세우는 派에 몰려 外戚이신 黃喜政丞이 一族과 함께 南原으로 流配 當해 檢校戶曹參判의 貞夫人 長水黃氏는 得粹女임으로 亦是 一族과 함께 다시 몰리는 形便이였으리라.  그러므로 湖南一世祖 淳의 誕生前年에는 [檢校戶曹參判公]義의 身邊慘禍요. 後年에는 外戚이신[黃喜政丞의 流配]로 말미암아 一族으로서 慘禍를 입게 된 것이다.(戊辰年霜月에 成馬 炳完書)

3. [譜冊이 없어 八世가 未祥]에 대하여
   [水城崔氏家廟立議] 에 記述이다.
   西記1648年(仁朝26年 2月 16日 內外戚 臨席下에 [八世가 未祥인데 中直大夫 淳도 계셔]라 하셨으니 [家廟立議]로 부터 百餘年後에 族譜編纂하는
先代宗人들께서 八世未祥인 空白을 메울려고 交通通信이 未及한 時代에 있어 京畿等地로 祖上을 찾아 방황하던중 우리는 水城崔氏라며, 本姓慶州金氏 舊安東系出이지만 벼슬을 크게 하시고 계신 門中이니 만치 世上에는 金氏로만 알려져 있기로, 잘못 찾아 水原에서 崔씨라면 尙저  (虎食當한 前水原戶長)의 아들로 虎잡이 孝子로 이름난 婁伯인지라 [水城이란 水原의 古號]이요 [水原은 水城]이니 [우리 始祖라 하신 有椿이 水原崔氏 七世孫에 [有자 봄春]이란 名單이 있어 우리 貫鄕은 [水城이요. 바로 水原인지라] 같은 [水城崔氏]이니 [水原崔氏五世孫부터 十世孫까지] 轉載하되 七世孫인 [有春]을 우리 始祖라 하신[有椿]으로 하여 五代祖로 올려下記表와 如한 [隋城崔氏 湖南世譜]가 發刊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後世子孫들에게 願望을 사는 過誤를 犯했다 해도 過言이 아닐것이다.   따라서 早速히 修正削除하여 우리 [湖南宗統]을 바로잡어 隋城伯 永奎 文惠始祖가 계신 三峰山麓丙坐之原宗統으로 돗대를 돌려 한 一家 한집안으로 連結지어 一瀉千里 한줄기로 한결같이 사랑받어 千派萬流 千枝萬葉 새끼치고 百家爭鳴,百花齊放하여 한半島 한길도다. 살고지고 嗚呼라 살고지고 살고지고..

水 原 崔 氏 世 系 表

一世

二世

五世

六世

七世

八世

九世

十世

十一世

尙저(者↓羽)
1150年代
前水原戶長

子 婁伯

子 倡

子 天啓
子 天盤

有春

子 敬사(草頭밑思)

子 允深
子 允誠

子 性老
居經

子 壽泳
子 壽丁

隋 城 崔 氏  湖 南 世 譜

賜姓始祖

俊系

1世祖

永 奎
(假)
1246생

有 椿

天 啓

敬萬

允深
初諱:允誠

居 經

諱:淳
字:子泳
1417生

(註)  수원 등지에서 지금도 崔씨를 찾으면 崔 婁伯 자손인 水原崔씨 집안을 가르쳐 주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경주金씨에서 賜姓한 隋城崔氏]라 해도 [그런 崔씨가 있었던가?] 하는 말이 돌아온다.  수원최씨와 혼동이 없도록 하는데는 [경주김씨 하고는 결혼을 못한다]는 구전을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하겠다.

(註) 신라 제35대 경덕왕16년(757)때  [水城]
      고려태조(918~943)때            [水州]
      고려 제24대 원종(1259~1274)때  [水原]
      제25대 충렬왕(1274~1308)때 [隋城]
      조선제3대 태종(1400~1418)때    [水原]
      조선제22대 정종(1776~1800)때   [華城]  그 후로 [漢南], 다시[水原]으로 개칭됨

(註)  隋城伯 永奎 文惠始祖 六세손의 諱, 字 出生年이다 (戊辰년 霜月에 成馬 崔 炳 完  書)

有臨

有容

有恒

有根

有憲

 

有椿

初諱

子昻

 

子常

子英

 

 

子泳

出生年

1426

 

 

1436

1429

 

1417

出生年

 

 

 

 

 

 

 

 

    4. 中直公 墓碑의 考察[注#2]
           湖南 一世祖 中直公 淳의 改碑 前 舊陰記에[果川世居]라 하여 [弘治己酉 淸明立]이라면 成宗20年(1489) 3月인지라 [武肅公家廟立議]보다 159년 전일 것이다.  그런데 武肅公께서는 우리 洛南始祖이신 [有椿] [中直公 淳]에 대한 仔細한 言及을 回避하신 것을 보면 碑文까지 默過한 사실을 우리가 重視해야 할 것이다.    <隱蔽, 廻避 文句>
          벼슬하신 兩班家門으로서 自存心과 體面上으로 當然히 隱蔽하셨으리라.
          果川이라면 隋城伯文惠始祖의 緣故地 水原에서 北쪽 三千里에 位置한 곳이요 中直公 誕生(西紀1447年)한 祖考 一族이 避身 隱居한 곳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文惠始祖 五世孫 水山께서 그 후로 풀려나서 西記1450年代 前後로 知安山郡事로 계셨으니 安山은 果川縣界 五里밖에 안되는 거리로 현 安山市이다.
    (註)  知郡事公 水山의 先는 長水黃氏이니 外戚에 [黃喜政丞]이 계셨다는 事實을 銘記하노라.(戊辰年霜月에 成馬 炳完書)

 

   ※   水城崔氏湖南世孫連系表 보기
   ※   수성최문대종친에게 보내는 친서 보기
                      (대동합보편찬위원회 위원장 최 병 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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